나의 살던 고향은 - (15) 북구 상안동(상)

▲ 달천 철장에서 바라본 농서초등학교쪽 마을. 나무에 가려진 곳이 농서초등학교(지금은 달천중학교로 바뀜), 그 앞에 상안리 마을 일부.
전형적인 ‘배수임산’ 지형 산과 강, 빼어난 풍광 조화

농서지역 마을 관문 역할 학교 위치한 문화의 중심

운동회·투표날이라도 되면 농서 5개 마을민들 한자리

반가운 대화로 즐거운 하루

#천혜의 자연 조건

지금의 북구 상안동은 광역시 승격 이전까지 오랫동안 울주군 농소면 상안리로 불렸다.

북쪽에 천곡동, 북서에 달천동, 남서엔 가대동, 남으로 시례동과 연결되고 동으로는 길게 동천강을 사이에 두고 호계동, 창평동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아담한 개울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가진 땅이었다. 서쪽으로 치술령의 삼 개 봉이 정면으로 마을을 바라보고 있으며 동쪽으론 태백정맥의 한 주령이 동대산과 무룡산으로 길게 이어져 굽이치며 달려가는 것이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곳이었다. 산과 강, 그리고 주변의 빼어난 풍광이 조화를 이루는 곳에 넓고 기름진 농지까지 갖추고 있어서 살기 좋은 곳이었다.

상안동은 농서의 천곡, 달천, 가대, 시례의 중심지로서 뿐만 아니라 이들 마을로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상안(常安), 늘 편안한 곳이란 뜻이다. 정말 그 이름만큼 평안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본동 마을과 양지마을 음지마을 동산 새터 등의 자연 부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본동과 양지 마을엔 학성이씨와 청안이씨가 반반씩, 동산마을과 새터 마을엔 월성이씨가 주로 살았다.

오랫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왔던 탓으로 주민들이 유순하고 인심이 넉넉하고 서로 다툰다든가 도둑과 같은 범죄가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마을이 오랫동안 반촌으로서 그 기반을 지켜왔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안 사람들은 법 없이도 산다고 했다.

#학교가 있던 마을

상안동은 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상점이 있고, 약국이 있고 이발소가 있는 곳이었다. 농소 호계동에 농소초등학교, 상안동에 농서초등학교가 있어서 농서지역 5개 동의 학생들이 농서초등학교에 다녔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학교는 문화의 중심지였다. 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5개 동의 사람들이 학교에 모여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무슨 선거나 국민투표가 있는 날에도 학교에 모였고, 민방위 훈련, 광복절 면민 축구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농서의 5 개의 사람들은 학교에 모였다.

필자의 집은 학교에서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는 우리의 안마당과 마찬가지였다. 늘 학교에서 놀았다. 제사 파젯날에는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한나절은 좋게 음식을 나누어 드셨고 저녁 무렵엔 학교의 선생님을 집으로 오시게 해서 술과 음식을 대접하셨다.

학교에 문제가 있거나 마을 사람의 협조가 필요할 땐 교장선생님은 자주 집에 들러 가친과 의논하곤 했다. 필자의 가친은 한학을 하셨고 울산의 종문에서 행세께나 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에 예의범절 양반의 자질을 밤낮없이 강조하시는 분이었다. 교장선생님들이 자주 집에 들렀던 것도 그런 면에서 공유할 수 있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우정 사진 -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정진락 (현 LG-니코 동제련 노사협력팀장), 필자, 이채식 (현 현대공업사 대표이사), 고인이 된 이채훈 선생, 이이원 (현 울산상고 교사).

시조 할아버지는 종2품 동지중추원사 충숙공이시고 19대조는 수사공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으며 18대조는 참봉, 17대조는 봉사(奉事), 16대조는 무과참봉, 15조는 무과에 급제한 훈련원 주부(主簿)였다. 14대조는 무과에 급제한 호조참의(戶曹參議), 13대조는 임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선무원종공신으로 훈련원 부정(副正) 난은공이시다. 12대조는 통훈대부장악원정, 11대조는 형조참의, 10대조는 형조참판, 9대조는 영남유림의 대유이시며 문장가로 계림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에 유배되었다가 ‘북정일기(北征日記)’라는 명문을 남긴 태화당공이시다.

8대조는 육영에 힘쓰시던 통덕랑이시고 고조부도 증조부도 울산 유림에서 다 좌장을 맡았던 분이었다. 가친은 수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학교 선생님들과 주로 나누시던 이야기도 이런 조상의 내력이나 울산향반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 시절에 어른들의 보편적인 대인관계의 한 면인지도 모른다. 조상의 내력을 일깨우고 어느 마을 어느 집의 예의범절이 어떻더라는 것이 그 시절 아버지들의 보편적인 가정교육의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다. 그 시절 가정교육은 조상의 내력을 듣는 것이 바로 조상을 본받아 바르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었던 같다. 학교 앞 사택에 사시는 선생님들에게는 채소와 계절따라 나는 찬거리를 자주 가져다 드리곤 했던 것도 선생님을 존경하는 반촌의 한 풍경이었다.

그때 집에 자주 들리곤 했던 분은 이웃에 사는 권승호, 이태명, 정용찬 교장 선생님, 그리고 엄돈영 이병우 선생님. 최돌수 선생님은 그때 신혼으로 학교사택에 계셨기 때문에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다정하시고 인품이 뛰어나신 분이었다. 이런 선생님들과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학교가 있는 마을에서 가질 수 있는 혜택이었다.


농서초등학교의 4회 졸업생이 제일중학교 제1회생(울산농고였으나 중학교로 분리되어 1회가 됨)이다. 그때 이곳의 학생들은 대부분 울산의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74~75세의 분들이다. 그때 제일중 1회였던 백형도 달천의 천곡 상안의 학생들과 함께 시례 장현동을 지나 걸어서 학교에까지 다녔다고 한다. 고 김태호 전 국회의원과 현 정갑윤 의원도 이 학교에 다녔다.

이충호 소설가·울산고 교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