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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가고싶다

  travel memorys
그곳에가고싶다
   열심히 일하지 않은 당신~
그래도 지발 우리 여행 떠나자.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2004-04-01 (목) 22:41
https://goo.gl/ywu7BP
ㆍ추천: 0  ㆍ조회: 4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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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면(덕성리)는?

학성이씨곡강파집성촌(덕성리)이 있는 흥해읍(구 곡강면)지역 소개글입니다.


삼한시대  : 다벌국(多伐國)영역으로 추정
신라초기  : 태화군
통일신라  : 의창군개칭 → 말기에는 남,북 미질부성으로 호칭
고려시대  : 남,북 미질부성을 합하여 흥해군으로 개명
조선시대  : 경주군에 내속되었던 기계면, 신광면, 북안면 일부가 흥해군으로 편입
일제강점기:흥해군 → 흥해면, 달전면, 곡강면, 신광면, 기계면, 포항면으로 분면
                흥해면 → 동하면, 동부면, 서부면지역의 리동을 15동으로 통폐합
대한민국
     - 56년 흥해면과 곡강면통합. 의창면 개칭
     - 57년 달전면(초곡, 학천, 성곡, 이인, 대련등)폐지후, 의창면 편입
     - 73년 의창면이 의창읍 승격
     - 83년 의창읍을 흥해읍(興海邑)으로 개칭
     - 88년 동을 리로개정
     - 94년 법정리30리, 행정리56리
     - 95년 포항시, 영일군통합(포항시 북구 흥해읍)
2001년 현재 : 법정리30리, 행정리57리 

 

매산리북송리마산리옥성리약성리학성리남성리성내리중성리망천리남송리곡강리
용한리우목리죽천리용곡리양백리덕성리덕장리용전리용천리금장리흥안리칠포리
오도리초곡리학천리성곡리이인리대련리

(1) 매산리(梅山里)
 1914년 기산(箕山), 용산(龍山), 매곡(梅谷), 백련(白蓮)을 합하여 매산(梅山)이라 하였다. 용연지가 건설되기  전에는 사시사철 많은 양의 물이 솟아올라 식수 해결과 농사 짓기에 유리 하였으므로 많은 가구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동제(洞祭)는 일제 때 폐지되었다.

 
심곡골(深谷)
 계곡이 깊어 불린 마을명으로 옛날부터 산송이가 유명하다.  조성목(趙性穆) 독립 유공자의 묘가 있다.
  
 
용산(龍山)
 300여 년 전 월성손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용을 닮은 산이 있어 마을명이 되었다.

 
매일(梅日)·매곡(梅谷)
 월성손씨가 200여 년 전에 일군 마을이다.  매화낙지형국(梅花落地形局)의 명당 터에 형성되어 매일, 매곡이라 불렀다 한다.

 
치미·치산(箕山)
 흔히 용산, 치산, 큰동네를 통칭하여 매일이라 부르기도 한다.  큰동네 북쪽 길 건너 마을로 50여호 살고 있다.
 앞산의 모습이 치[箕]('키'의 방언)를 닮아 불린 이름이다. 이 마을 뒤에 포항시 농업기술 센터가 들어서 있다.

 
백련(白蓮)
 도음산 북동쪽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백련사(白連寺)란 작은 절이 있다. 160여 년전부터 마을을 이루었는데, 최근에는 각종 식당·여관들이 들어서 있다.

(2)북송리(北松里)
 두내와 양촌(陽村), 천방, 큰동네, 건너각단을 합하여 1914년 북송(北松)이라 했다. 조선 철종때 흥해군수 이득강(李得江)이 곡강천(曲江川)에 제방을 쌓고 4리에 뻗친 송림(北川藪)을 조성 하였으므로 북송(北松)이라 부른다.
고종 때 지홍관(池弘寬) 군수가 주도하여 고쳐 쌓았다 한다. 동제사는 건너각단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큰마을
 
신광 가는 도로변 북쪽에 위치하며 가장 큰 동네로서 중심마을이다. 이 마을과 양촌리 사이에 신광 마북저수지 축조로 인한 침수지역 이주민 34호가 1994년부터 집단거주 지역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



 
건너각단
 
연안 차씨(車氏)가 터를 잡은 마을이다.  영일 정씨 묘역에 동제당과 이득강 군수와 지홍관 군수의 유공비가 있다.
  
 
양촌(陽村)
 조선조 말엽 류양촌(柳良村)이 귀양살이를 했다 하여 양촌(良村)이라 부른 것이 양촌(陽村)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터주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북천방 새각단
근세에 북천방 가까이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흥해서부초등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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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산리(馬山里)
 흥해군 서부면에 속했을 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었다.  앞산을 말머리산(馬頭山)이나 말뫼(馬山)라 부른데 연유한다고도 하며, 삼국시대 이전부터 훈련 나온 병사들이 말을 매어 두던 곳이 있었던 이유로 마장동(馬場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200여 년 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터를 잡은 마을이라 하며, 동제사는 음력 8월 11일과 10월 9일에 지낸다. 1979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남쪽 말뫼산록에 17호가 들어서면서 여러 공동 주택이 건립되어 큰 마을로 변모하였다.

 
1리
 1993년 세종황제맨션을 시작으로 대흥온천맨션, 한동맨션 등의 공동주택이 들어서 있고 자연부락과 합쳐 887호가 거주하고 있다.   청룡사(靑龍寺), 포항전신전화국 흥해분국이 있다.  마을 서남쪽에 옛날 대추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대추밭걸이 있고 그 앞에 탕건처럼 생긴 탕건산이 있다.  산꼭대기에고려장(高麗葬)을 했다는 큰 무덤이 있다.

 
2리
 마산사거리 동쪽 옛날 사과 과수원 일대에 대성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1988)  많은 아파트가 세워졌다
 대성아파트 입구에 절부(節婦) 영양이씨의 비(曲江崔氏妻英陽李氏碑)가 있다.
 

(4) 옥성리(玉城里)

1914년 교동(校洞), 죽림동(竹林洞), 옥동(玉洞), 성서동(城西洞), 성동(城洞), 신정동(新井洞-일명 神堂谷)을 합하여 옥성(玉城)이라 하였다. 향교(鄕校)가 있는 흥발산(興發山-일명 鄕校山) 주위에1리, 신당곡(神堂谷)에 2리가 위치한다.

 
옥동(玉洞)
 흥해군 시대에 이르도록 향교산 북쪽 흥해 제일교회 일원에 옥(獄)이 있어 옥(獄)거리, 옥리, 옥동(獄洞)이라 부르던 것을 옥동(玉洞)이라 하게 되었다 한다.  흥해중학교, 포항농지개량조합이 있다. 향교와 체육공원과 임허사(臨墟寺)가 이팝나무숲(지방기념물 제21호)속에 있는 향교산은 소가 누운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화우산(臥牛山), 와우대(臥牛臺)라고도 부르며, 임허산, 임허대, 흥발산이라고도 부른다. 이팝청년회가 조직되어 (1991.12)가 매년 이팝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신당곡·신정동(神堂谷·新井洞)
 1554년경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숲을 치고 정착하면서 앞산에 신당(神堂)을 두어서, 또는 사직단(社稷壇)이 있어서 시니당골이라 불리었고, 100여 년 전 김해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새 우물을 팠으므로 신정동(新井洞)이라 교쳐 부르기도 하였다 한다. 흥해공업고등학교(구 흥해고등학교. 1977년 설립 문화주택 22호(1979년 건립), 녹원빌라 등이 들어서 있다.  흥해공고 정구장 왼쪽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내고 있다.  읍사무소 뒤에는 처음 망창산(望昌山)에 건립되어(1951.5.5) 통일동산을 거쳐(1971) 1996년에 이곳으로 재이건한 반공애국자위령탑이 있는데, 이 탑의 글은 이은상(李殷相)선생이 찬(撰)하였다. 1996년 12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읍청사 부지 정리 공사 때 여러시기에 걸친 고분과 토기가 발굴되었다. 마을 동남쪽 흥해 성광교회 부근에 약 5,000여 평 규모의 서림못(서림지,서리베, 새둑못)이 있는데 조선 숙종 때 흥해군수 이의활(李宜活)이 막았다고 한다. 연꽂이 자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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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약성리(藥城里)
 1914년 약전(藥田), 북성(北城), 중흥(中興), 북문(北門)을 합하여 약성(藥城)이라 하였다. 1987년 이후 아파트가 다수 건립되면서 근래에는 1,100여 호 규모의 동네로 발전해 있다. 흥해초등학교, 향가심인당(진각종,1954), 소명교회가 있다.

 
약전(藥田)
 흥해군 당시까지 있었던 약초를 재배하던 밭에 연유한 마을명으로 약성리의 중심마을이었다.

 
북문밖·북성리(北城里)
 흥해성(城)의 북문 밖에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다.  흥해초등학교 남동쪽 마을로 종전 청하, 영덕 방면 국도가 있는 길목에 위치한다.

 
상중리(上中里)·중흥리(中興里)
 약전리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이라 중리·중흥리라 불렀고, 그 위 북서쪽 200m 지점의 과수원 지대 있던 마을을 상 중리 중간에 있었던 연당터도 메워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6) 학성리(學城里)
 
옛 흥해읍성의 북문 밖에서 그 동북쪽으로 형성된 마을로 동부면 지역의 학성(學城), 곡성(曲城), 북흥(北興), 북원(北園)을 합하여 1914년 학성(學城)이라 하였다.  변화가 별로 없는 조용한 마을이다

 
학성(學城)
 예로부터 이 마을에 글방이 많아서 학성(學城)이라 불렀다 한다.  한편으로는 읍성의 형태가 학(鶴)의 날개 같다 하여 학성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옹성리·곡성리(曲城里)
 성벽의 선이 굽이진 곳에 망대(望臺)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옹기 같다하여 옹성(甕城), 또는 굽진 곳에 있다 하여 곡성(曲城)이라 하고, 그 주위 성 밖에 형성된 마을을 옹성리,곡성리라 불렀다 한다.
 중성리와 경계지점에 흥해중앙교회가 있다.

 
북성리·북흥리(北興里)·북문리(北門里)
 현 흥해초등학교 동편 마을로서 옛 북문에서 연결된 도로를 경계로 하여 약성리와 갈라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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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마치·새만리·뒷내
 학성 북동쪽 100여 m 떨어진 지대로서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물이 작은 내를 이루어 여름이면 인근 주민들이 더위를 식히고 몸을 씻기 위해 모여들던 곳이다.

 (7) 남성리(南城里)
 흥해읍 성터 남쪽에 형성된 마을로서 1914년 남문밖, 못산[池山](못안), 배말곶이(배말꼭대기), 구름다리(雲橋), 산메기, 성황동, 양곡(暘谷)을 합하여 남성(南城)이라 하였다. 1989년부터 배말곶이 앞들에서 남미질부성 북편에  이르는 대단위 주택단지가 조성되어 2,073호의 큰 마을로 변모하였다.

 
남문밖·남문동(南門洞)
 남문터에서 남쪽으로 형성된 큰 마을이다.  흥해우체국이 남성문지(南門城址) 앞에 있다.

 
배말곶이·배말꼭대기
 
지형이 약간 솟은 곳으로서 옛날 배를 매었다는 구전에 따라 지어진 지명이라 한다. 마을 앞에 권무정(權武亭)과  청덕사(淸德祠)가 있고 그 뜰에 興海九堤記積碑와 다섯 개의 선정비가 있다.  
 권무정은 조선순종 12년 군수 김영수가 금 500냥을 들여 건립한 것으로 이 고을 청장년들이 무술을 연마하 던 곳이었다.  남미질부성 바로 북편에 흥해남산초등학교(1998년 개교)가 있다.

 
못산(池山)·못안
 신라시대에 쌓았다는 남미질부성지(南彌秩夫城址)의 성내(城內)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 까지 못가의 성황당에서 행해지던 동제의 유습이 벌천(伐泉)마을로 옮겨져 이어지고 있다. 못의 동북에 있는 망창산(望昌山.41m) 서편 산허리에 전파감시소가 있다가 폐지되었다.  장승배기에 裵斗汝旌閭閣과 SGI 한국불교 흥해 회관이 있다.  동제사는 마을 남동쪽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양촌(暘谷)
 
권무정의 서편 옥성리와의 경계지점에 있었던 마을이라 전한다.

(8) 성내리(城內里)
 고려 우왕 15년 돌로 다시 쌓은 둘레 1,493척(실측 약 800m)의 흥해읍성지를 따라 그 안팎으로 형성된 북성(北城), 서성(西城), 동성(東城)을 합하여 1914년 성내(城內)라 하였다. 후에 남문 안쪽에 마을(南城內·南門안)이 형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 시장과 각종 상점이 많이 입주한 흥해의 중심 시가지로 되었다.
 옛 관아터에는 포항문화원 사회교육관(구 영일문화원)과 영일민속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1924년 구 읍사무소터에 이건하였던 제남헌(濟南軒)이 1976년 다시 원위치의 10여m 남쪽에 이건되어 민속박물관 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 앞뜰에는 500여 년생 회화나무(가슴둘레6.5 m)가 두 그루 남아 있다.
 현 흥해 보건지소(구 흡청사)의 불망비들과 한말의 병항왜혈전기념비가 민속박물관에 옮겨 세워져 있다. 읍성의 석축 흔적은 현 민속박물관 서쪽 담 밖과 남문지(址)에, 그리고 동문지(址)에 일부씩 남아 있다. 옛 객사(客舍)터 북쪽에 흥해파출소가 있고, 마주하여 흥해농협이 자리한다. 객사터 동쪽은 시장이 형성 되어 있다. 구 흥해읍사무소는 옛 관아지(官衙址) 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성벽의 돌은 일제 때 포항축항공사(浦項築港工事 )에 이용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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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중성리(中城里)
 흥해읍성의 동쪽에 위치하며 1914년 중리(中里), 야성(野城), 광성(廣城), 이화리(梨花里)를 합하여 중리의 '中'자와 야성의 '城'자를 따서 중성(中城)이라 하였다. 중리(中里) 1리로 읍성 밖 동편 마을들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중리라 하였다.

 
광세이(野城·廣城)
 2리로 망창산(41m) 북쪽에 위치한다.  마을 앞들에 넓은 성지(남미질부성)가 있다 하여 야성 혹은 광성이라 불렀다 한다.
  
 
배꼬지(梨花里)
 
2리로 동쪽에 위치하며 옛날 배가 드나들던 곶(串)이어서 불린 지명이다. 또한 조선조 현종 때 중신 민유중(閔維重 )이 유배를 당하여 이곳에 살면서 배나무를 재배하였으므로 이화평(梨花坪)이라 부른 것이 이화리(梨花里)되었다  고도 한다.  8.15해방 이후부터 큰 마을로 변천하여 '해방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동대학 방향 도로 왼쪽에 있는 약물둠벙은 주변 미나리꽝과 노의 수원지 역할을 해 왔다 

 (10) 망천리(望泉里)
1914년 망창(望昌), 동부(東部), 벌천(伐泉)과 동하면(東下面)의 서원동(書院洞) 일부를 병합 하여 망천(望泉)이라 하였다.

 ☞망창(望昌)·역촌(驛村)
 조선시대에 역(驛)이 망창산 남쪽 기슭에 있었고 포항으로 연결되는 감투재로 가는 길이 이 마을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망천과 구별하여 원망천(元望泉), 원망창(元望昌)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쪽 망창들 너머 갈밭에 역원용 말을 기르던 목장이 있었다 하며 동제사는 20년 전에 폐지하였다. 망창 산방 구메기에 있던 반공애국자위령비는 현재 읍사무소 뒤에 있다.  남천방변의 자라모양 둔덕을 오무(鰲舞)라 하고, 그 앞들에 비(碑)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여 '비앞'이라 부른다.  흥해 리라유치원이 있다.

 ☞벌샘이(伐泉·羅泉)
 
마을회관 옆에 물이 솟아나는 큰 샘이 있어 벌샘이라 하였다. 한때 동부면 사무소가 있었다.  500 여년 전영일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일구었다고 한다. 벌샘이 북쪽에 400여 년생 회화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고 그 앞에 화짓 대배기란 터가 있는데 영일 정씨 성검(晟儉)이란 선비가 과거에 급제 하여 그 집에 화짓대(솟대)를 세웠던 곳이라  전하며, 그 북쪽 옛 서당 부근에 윤리학당(倫理學堂)이 있었다. 벌샘이 옆에 울림석(蔚林石)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길을 낼 때 묻어버렸다고 한다.
 벌샘이 곁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제사를 지내왔으나 3년 전에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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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남송리(南松里)
 1914년 남대동(南大洞), 송동(松洞), 남휴동(南休洞), 서원동(書院洞)을 합하여 남송(南松)이라 하였다.
  
 
마들
  
남송 1리에 해당하며, 해방후에 조성된 마을로 작은 하천을 경계로 성곡리와 나뉜다.  흥해읍성과 수군만호진기(水軍萬戶鎭基)였던 두무치(두호동)와의 주도로가 이 마을과 새터 사이를 지났다.  말이 사육되는 곳이었기에 불리워진 지명으로 추측된다.  의송교회가 있다.

 
새터·남휴동(南休洞)  
 1리로 250여 년 전 김해김씨가 마을을 일구었다 하며, 해방 후 새로이 커진 마을이 되었다 하여 새터라 불렀다 한다.  흥해군수가 부임할 때에는 그 외 두무치나 읍성을 오가는 관리들이 이 마을에서 쉬어 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남휴 동이라 했다 한다.  한동어린이집(1996년 개원)이 있고, 송림 속 제당에서 6년 전까지 동제사를 지냈다.

 
송동(松洞)
 2리로 소나무와 관계되는 지명은 난을 무사히 피할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서 월성박씨와 월성최씨가 개척한 마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난을 무사히 피했다는 기념으로 마을 어귀에 솔씨 10개를 심은 것이 자라나 지금은 아름드리 소나무로 변해서 풍치를 자랑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일제시대에 지게로 흙을 쳐서 막은 3,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해 마을 사람들이 쉽게 타지로 떠나지 못하도록 40여 년 전에 소쿠리 입구에 해당하는 이 못 둑에 소나무를 심어 놓았다고 한다.
15년 전까지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냈다.  송림사가 있다.

 
짓댕이(池塘)
 3리로 못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지당(池塘)이라 했다고도 하며, 주위의 토질이 비만 오면 몹시 질컥거리는  질땅이란 뜻으로 짓댕이(池塘里)라 불렀다 한다.  마을 앞에 2,000여 평 규모의 못이 있고 못 앞 야산 뒷자락에 두산 포도농원이 있던 자리에 한동대학교(1995년 개 )가 들어서 있다.
 뻣재말랭이 또는 막재말랭이라는 언덕에서 정월보름에 달맞이를 했다고 한다.   마을 서쪽 흥해안들 방향에 일제시대에 조성한 4000여 평의 아랫 못(일명 관답 못)이 있고 그 바로 앞에 구갈밭(蘆 田坪)이라는 들이 있다.  일제시대에 개간한 들이다.  주변에 배밭이 많다.

 
서원마을
 
3리로 임란창의공신 정삼농(鄭三農)이 서원을 창건하였던 마을이다.  지금은 5호가 살고 있으며 곡강 최씨 재실 영모재(永慕齋)가 있다.  서쪽 산록(사모산, 鰲山) 개머리 끝에는 곡강최씨 시조 곡강 부원군 최호(崔湖)의 묘가 있다.     이 마을 북쪽 곡강 어귀에 있던 분뇨종말처리장은 북미질부성 동남쪽 산밑으로 옮겨갔다.  3리로 사모산(鰲山)과 남대실 사이에 있는 골짜기를 무심골이라 하는데, 사모산 동북 산자락의 곡강 양수장 바로 옆 자연석에 충비순량비(忠婢順良碑)가 있다.  이 비(碑) 바로 앞 곡강천 건너편 북미질부산성 벼랑의 두 개의 바위 사이(간격 30㎝,깊이5m)에 상반신만 있는 3기의 부처가 있다.

 
남대실(南大洞)
 3리로 남송리의 중심 마을이다. 터주는 월성이씨다. 동제사는 섣달에 택일하여 지내고 있다. 1960 연대에 마을 뒤 야산 규조토 속에 다량의 고래 척추뼈가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된 바 있다. 사모관대 (紗帽冠帶)를 한 모습의 사모산이 있고, 산남의진 참모장 정순기(鄭純基)의 묘가 있다.  1963년 9월 1 일자로 개교하여 졸업생 810명을 배출한 흥해초등학교 남송분교는 1994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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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곡강리(曲江里)
1914년 봉림이, 동골, 너구(汝口), 흥곡(興谷), 곡강, 봉림이불 등 자연부락을 합하여 곡강(曲江) 이라 하였다.
  
 
봉림이(鳳林)
 1리로 뒷산의 지세가 봉(鳳)의 형국으로 봉이 대밭에서 먹이를 얻는지라 봉림(鳳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짓달 초하룻날 동제를 지낸다.   마을 서쪽 구도로 입구의 형세가 부채처럼 생겨서 선지(扇紙) 고개라 한다.  마을입구에 있는 팽나무(300여 년생)의 잎 돋는 모습을 보고 그해 농사를 가늠했다 한다.  한때 동하며 소재지였다.  경주 최씨와 진주하씨의 집성촌이다. 1765년 발간된 영일 읍지에 이 마을 앞  큰들을 봉림호(鳳林湖)라 기록하고 있다.  들 중간 도로(봉림-너구)의 남쪽을 배달 이들, 도로 북쪽을 갯들이라 한다.

 
동골(東谷)
  
2리에 속하며 넓은 구릉지에 형성된 마을이다.  너구(汝口)의 동쪽 골이란 뜻이며, 이 지역은 물론 용한(龍汗)-우목리(牛目里)에 이르는 해안 촌락의 터주가 대부분 여씨(汝氏)라 한다.

 
너구(汝口)
 2리로 여씨(
汝氏)가 집성세거하던 마을이라하여 여구(汝口)라 한 것이 변음되어 흔히 너구라고 부른다.   동제사는  동짓달 초이튿날 너구와 동곡 사이에 있는 제당에서 지내며 터주신위로 여씨를 모신다고 한다.   제당 밑에 곡강교 회가 있다. 너구가 2리의 중심 마을이다.  답다리 못(천마지)이 건설 되고, 시금치  특화단지가 조성되어  잘 사는 마을로 변했다.

 
흥곡(興谷)
 2리로 너구 남쪽 언덕비탈에 위치한다.  이 골에 들어와서 살면 흥(興)한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마을 남서쪽 언덕 위의 제당(당산목 200년생 소나무)에서 동짓달 초나흗날에 동제를 지낸다. 1969년 준공된 천마지(답다리 못) 남쪽에 대각사(구 용화사)가 있다.  이 답다리 골 어귀에는 두부(頭部)가 파손된 미륵석불 (높이 1.8mm 연좌대 직경 2m)이 남아 있다.  천마지 앞들은 옛날 봉림호수였을 때 배를 매달아 두던 곳이라 배다리들이라고 부른다. 말을 닮은 천마산(天馬山)은 말머리·말잔등 말꼬리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말목 부분이 잘린 것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옛날 남송리 무심골  에 살던 한 장수가 천마가 화살보다 느리다고 목을 내리쳤는데, 그 순간 말이 산으로변했다고 한다.

 
곡강(曲江)
 
3리로 신라시대에 병마를 방목사육했던 지역으로 나부산(放牧山)이라 부르는 야산이 곡강천을 경계로 곤륜산(崑崙山.177m. 일명 高靈山)과 마주하고 있다.  산의 북동쪽 기슭에 세 돔으로 나누어 마을이 형성 되었다.  웃각단은 나부산밑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남쪽 제당에서 동지달 초나흗날 제사를지낸다.  마을 뒤쪽에 해주오씨 재실이 있다.

 
봉림이불마을
 
3리로 영일정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20년 전까지 동제사를 정월보름날 지재다가 폐지했다. 이 지역 해안선을  따라 봉림수(鳳林藪)가 있었다.  효종 때 최군수가 모두 베어 샛바람이 극심하자 방목 하던 말을 구룡포의 북목(北牧 )으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주변 송림 속에 모래밭을 일구어 만든 시금치 단지가 있다.

 (13) 용한리(龍汗里)
1914년 용덕(龍德)과 소한(小汗)을 합하여 용한리(龍汗里)라 하고 각각 1,2로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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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덕(龍德)
  
이 마을의 지형이 큰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으며 용의 덕(德)을 입어 살아가는 곳이라고 용덕(龍德) 이라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마을의 지형이 용두(龍頭)에 해당하며 용이 화를 내어 포효(咆哮)하는 형국이라  용이 마을 사람들 에게 덕을 베풀라는 뜻으로 용덕이라 불렀다 한다.  용의 입안에 해당하 는 곳에 제당이  있어 삼월삼짇날과 동짓달  초사흗날 동제사를 지내고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흥일교회(1975. 4. 7 건립)가 있다. 15년 전까지는 이 마을에서 봉림이불까지 곳곳에 해당화 군락지 가 있었다.  마을 앞 바다에는 영일만 신항개발  외곽시설인 북 방파제 축조 공사가 2002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다.

 
소한(小汗)
 2리로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 작은 내에 땀을 씻기 위해 주민들이 모여든다 하여 소한리라 한다.
 오천장씨가 마을 터전을 잡았다.  동제사는 8월 보름과 동짓달 초이렛날에 지내며,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마을 뒤쪽 오천정씨 재실이 있는 문중산인 큰산(大山)은 소(牛)를 닮았다 하여 우혈(牛穴) 이라 불린다.

 (14) 우목리(牛目里)
 1914년 왜골과 우목(牛目)을 합하여 우목리(牛目里)라 하였다.   우목은 누워있는 소의 눈 위치 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불리어진 지명이라 한다.  또한 우목구미(牛目龜尾)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마을 뒷산의 형세가 거북 모양이고 그 꼬리 부분에 동네가 자리잡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삼월 삼짇날과 동짓달 초사흗날에 동제사를 지낸다.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낸다.  왜골(왜목)은 왜구 감시 초소가  있어 불린 마을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동네 뒷편의 봉화산(烽火山)에서 추석 이튿날 (음력 8월 16일)에 연안 5개동 주민들이  모여 그네타기와 농악놀이 등의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죽전초등학교, 우체국, 보건지료소, 전신전화국등의 공공기관이 있어 해안 여러 마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초등학교 교정에 향토개발선구자유공비,  죽천방면 우측 산에 해병제일상륙사단 자매결연비 (1996), 제당 어귀의  향토개발유공기념비, 마을 북동  해변 언덕 위에 조선일민무호박공도해비(朝鮮逸民無號朴公跳海碑)가 있다. 

 (15) 죽천리(竹川里)
 1914년 봉화산(烽火山)의 동남 기슭 해안의 어촌 지을(知乙)과 대벌이를 합하여 죽천(竹川)이라 하였다.

 지을(知乙)
1리로 옛날에 숲과 물이 좋아 새들이 알고 많이 서식하였기에 불리어진 지명이라한다.  동지달 초사흗날  동제사를  지내고 이어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흥해 침례교회, 죽천교회가 있다.
  
 
대벌이(竹川里)
 
2리로 이대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 여남천(汝南川)의 하구에 형성된 어촌이다. 대나무가 많은 벌에 있다고  대벌이라 부른다.  동짓달 초이튿날에 동제사를 지낸다. 1988년 포항 1대학(구 포항실업전문대학)이 포항시  송도동에서 이곳으로 이건되었다.   대학의 서편 절골에는 1986년 일붕선교종(一鵬 禪敎宗)에서 설립한 세심선원(洗心禪院)과 인동장씨 재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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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용곡리(龍谷里)
 
1914년 용연(龍淵)과 이곡(耳谷)을 합하여 용곡(龍谷)이라 하고 곡강면에 속했었다.
 
  
이곡(耳谷)
 마을의 모습이 귀와 같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뒤 산록에 마을이 있었다.  귀일이라고도 부른다.   터주 인동장씨 재실 인예정(印裔亭)과 월성김씨 재사 용담정(龍潭亭)이 있다.

 
새터(新基)
 북천가에 용연(龍淵)이란 마을이 있었는데 수해로 폐허가 되고 이주하여 새로 일군 마을이다.  호리 못 둑  아래에  정교보 유공비가 있다.

 (17) 양백리(兩白里)
 1914년 내백(內白)과 외백(外白)을 합하여 양백(兩白)이라 하였다.  한때 북상면 사무소가 있었으며,  마을 서편의  성지곡(聖旨谷. 일명 鶴谷) 일대에 학의 대서식처가 있어 산이 희게 보였기에 백산(白山)이라  불렀다 전한다.

 외백(外白)
 1리로 인천채씨(仁川蔡氏) 집성촌이다.  1966년 3월 1일에 개교하여 졸업생 206명을 배출한 곡강 초등학교 양백분교장이 1990년 3월 1일자로 폐교되었다.  양백교회와 채씨 재실 영모정(永慕亭)이있다.  뒷산 2㎞쯤 오르면 고려말  배천희(裵千熙) 국사의 묘와 말(혹은 禦侮校尉) 무덤이 가리점[葛点]에 있다.

 
내백(內白)
  2리로 여강이씨와 오천정씨 집성촌이었다.  여강이씨 재실 해강정(海崗亭)이 있다. 동제사는 마을 앞  백산제(白山堤)에 있는 제당에서 정월보름날 지낸다.

 (18) 덕성리(德城里) - 학성이씨곡강파 집성촌
 1914년 덕곡(德谷)과 장성(長城)을 병합하여 덕성(德城)이라 하였다.  장성 마을 입구 덕성사 (德城寺) 앞 건너편에 있는 수뢰탕은 신경통과 땀띠 같은 피부병에 탁월한 효험이 있었다 한다.

 덕실(德谷)
 1리로 흥해읍의 최북서단에 위치하며 월성이씨 집성촌이다.  덕이 있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덕실(德室· 德實)이라 불렀다 한다.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올린다. 골안 못이 있으며, 남쪽에 일제시대에  막은 공리 못은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 마을 월성이씨 입향조를 추모하는 재실 이상 재(履想齋)가 있다.

 
장성(長城)
  2리로 원래는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 불노동(不老洞), 장생(長生)골이라 하여 흔히 장생이라 불렀는데  어떤 흥해 군수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선생의 고명(高名)과 같다 하여 장성(長城)으로 고쳐 쓰게 하였다 한다.  신라대에 축조한 장생지(長生池) 안 터에 형성된 마을로서 하천 북쪽을 안 마을 ,건너편 성좌산(聖座山) 기슭에 밤나무가 많던 지역 마을을 율리(栗里)라 부른다  율리에는 학성이씨 재실 태암정(泰巖亭)이 있다.  예로부터 동제사가 없는 마을이다. 장생지의 못둑 흔적이 아직도 또렷 하게 남아 있으며, 마을  입구에 비학산 덕성사(1994년)라는 절이 있다.

 
안동네
  
못 안 마을로서 동초산(董草山) 기슭 양지바른 곳에 학성이씨가 집성세거하고 있다. 학성이씨 재실 덕봉재(德峯齋), 애일당(愛日堂)이 있으며, 화왕산(火旺山) 전투 때 창의종군하였던 이봉수, 이열 의사의 출신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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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덕장리(德壯里)
 1914년 못밑(德山), 원두들, 장자(壯者)를 병합하여 덕장(德壯)이라 했다.

 
웃장자
 
옛 마을은 현재의 마을 뒷산 장자봉(壯者峯) 기슭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려 이전부터 백만장자가 살았다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아랫장자마을 북단에 장사가 나는 샘이 있어 장사(壯士) 마을이라 한 것이 장자동(壯者洞)으로 굳어졌다고도 전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밑둘레 2.6m, 수고 8m 반송(盤松) 정자목이  있다.  남서쪽에는 작은 못이 둘 있는데 남쪽 것은 헌못, 그 북편 것은 새못이라 하며 부근에 피부병이나  위장병에 효험이 높은 약수터가 있다.  7번 국도변에 전몰대한반공청년망 향비와 훈련중 헬기사고로 죽은  미군위령비가 있다.

 
아랫장자
 
7번국도가 이 마을 동편 진(陳)두들을 통과하고 있으며, 신라대에 부호가 살던 웃장자 마을에서 전라도  모처에서  구하여온 긴 뿔 나팔을 못가의 누각에서 불어 시간을 알리게 하여, 못 이름을 둔각지(頓角池)라  했다 한다.  경주김씨가 터주다.  옛날부터 동제가 없었다. 옛 별래재에는 일제치하에 철도부설을 하기  위해 뚫은 터널이 남아 있다.

 
못밑·덕산(德山)
 못이 있는 장성마을의 아래에 있다고 못밑이라 한다.  주위 산들이 바람을 막아 마을에 덕을 준다 하여  일명 덕산(德山)이라고도 부른다.  정월보름날 2년에 한 번씩 동제사를 지낸다.  원두들에 조선 조때 역원(驛院)이 있었다 한다.

 (20) 용전리(龍田里)
 1914년 신성동(新成洞)과 용전(龍田), 임천(林泉)의 일부를 합하여 용전리(龍田里)라 하고 각각  1,2리로  나누었다.

 신성동(新成洞)
 
원래 이 마을 북서쪽에 있던 안삼바리(三海)라는 어촌이 없어지고 이곳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자  신성동(新成洞)혹은 삼바리라 부르게 되었다 전한다.

 
용전(龍田)
  마을 뒤에 용두(龍頭)들이 있는데, 이 지역에 누워 있던 큰 용이 승천하면서 꼬리로 곡강의 하구를 치니  그 때까지 호수였던 이 지역의 물이 빠져서 육지가 되었다는 전설에 의해 용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용두들  끝에 있는 동제당에서  정월보름에 동제사를 지내오다가 13년 전부터 폐지하였다. 도로변에 곡강최씨 재실인 용전재(龍田齋)가 있다.

 
임천(林川)
 용전과 합하여 2리에 속한다.  노씨와 금씨가 마을을 일구었다고도 전하며, 옛 길을 기준으로 용전과  용천으로 분리된 상태다.  곡강지서와 곡강면 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21) 용천리(龍泉里)
 1914년 용소(龍沼), 임천(林泉), 굴산(屈山), 신땀(新潭), 벌재(伐堤) 등을 통틀어 용천(龍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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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산(屈山)
 1리로 강물(北川)이 마을 앞에서 굽이쳐 흘렸기에 굴산이라 불렀다 한다. 용주사(龍珠寺)란 작은 암자가  있다.
  
 
임천(林泉)
 1리로 마을 동편에 숲이 있었는데 그 속에 샘이 있어 임천이라 하였다 한다. 노씨와 금씨가 일군 마을이라  한다.   용전리의 임천과 용천리의 임천으로 분리되어 있다. 용천교회와 곡강제일교회가 있다. 곡강초등학교 앞에  있던 영일지방사방준공탑은 1994년경 오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철거되어 오도(烏島)로 축소 변형 이건되었다.

 
용슬(龍膝·龍沼)
 2리로 옛날에 마을 앞으로 소하천이 흐르면서 소(沼)를 형성했는데 그 모습이 용을 닯은 데다 용이  승천  했다는 전설이 있어서 용소라 했으며, 마을의 위치나 형태가 용의 무릎에 해당된다 하여 용슬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다.   용소터 남쪽에 있는 300여 평의 소나무 군락지를 딴봉이라 부른다.  이안에 있는 제당에서  2년마다 신땀마을과  합동으로 동제사를 지냈으나 5년 전부터 지내지 않는다.

 
신땀(新潭)
 
2리로 용소마을 북동쪽에 있고, 맑은 물웅덩이를 개발한 데 연유한 지명이라 한다. 오천정씨 묘역에 벼락  바위가 있다. 

 
별재(伐齋)
 2리로 별래재 남쪽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다. 옛길로 가는 산록에 많은 공장들이 서있다. 고갯마루에는  큰 서낭당이 있다.

 (22) 금장리(金壯里)
 1914년 금사(金沙), 선돌배기, 장동(壯洞), 바래미, 방근(芳近), 실안 등을 합하여 금장(金壯) 이라 하고  곡강면에  속하였다.

 금사(金沙)
 1리의 중심 마을로 옛날 마을 뒷산에서 사금이 나온다 하여 금사동 혹은 금사방이라 불렀다. 서당 마을이라  부르기도 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이 치소포란형(雉巢抱卵形)에 해당하여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한다.  영천이씨 재실인 사재정(沙齋亭)이 있다.  잠자골 산 정상에 아구할망 바위가 있다 정월보름날 동제사를  지낸다.

 
선돌배기(立石) · 새탑
 1리로 입곱 개의 고인돌이 있던 곳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장동(壯洞)
 
1리로 수곡(壽谷)산 아래 골짜기에 위치하며 봉화금씨만 6호 세거하고 있다. 정월보름에 남쪽 바래미의  협동으로 동제사를 지낸다.

 
바래미
 1리로 지형이 바릿대 같다 하여 발산(鉢山), 혹은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바래미라불렀다 한다.

 
방근(芳近)
 
2리로 멀리 개천이 보인다고 망계(望溪)라 했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 하여 방근(芳近)으로 개칭했다 한다.  정월에 택일하여 동제를 지낸다.

 
실안
 2리로 곤륜산 서편으로 못이 메워진 자리에 형성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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