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임진왜란때 대활약 이겸수

▲ 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12일 정해 2번째 글(빨간선). 비변사가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이간책을 아뢰는 중, 왕이 “이겸수(李謙受)도 함께 올라오도록 하라”고 언급하고 있다.

조선 최초 통신사 이예의 6대손
기장현감·정주판관까지 벼슬에 올라
선조실록·분충서난독에 활약상 기록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와 함께 활동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등청정과 회담
3회중 3번째는 이겸수만 대표로 나가

적을 교란시키려는 기획 ‘반간계’
비변사의 중대임무 이겸수에 맡겨져
가등청정-소서행장 이간하는데 노력

선조 임금이 신임했던 외교관
상황청취때 이겸수도 서울상경 명해
명 사신 대마도 파견때도 탐지 임무

이겸수(李謙受·1555~1598)는 임진왜란 중 사명대사와 함께 활동했던 외교관이다. 관향은 학성이며, 조선 최초의 통신사 충숙공 이예의 6대손이다. 벼슬은 기장현감, 정주판관에 이르렀고 향년 44세로 요절했다. 그의 외교활동은 『선조실록』과 함께 사명대사의 문집인 『분충서난록(奮忠舒難錄)』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1592년 4월 부산포에 상륙한 20만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명의 지원군이 6월에 도착하였고, 7월에는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 대승하여 제해권을 장악했다. 울산과 국내 각처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왜군의 후미를 교란했다. 8월에는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었다. 1593년 8월에는 명군의 철군과 함께 왜군도 함경도·평안도로부터 남하하고 10월에는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왜군은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약 4만의 병력으로 국토의 동남단을 점령한 상태에 있었다.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겸수가 강화회담의 외교관으로 활동한 것은 바로 이즈음, 1594년 4월에서 12월에 이르는 기간이었다. 이에 앞선 1592~1593년에 이겸수는 울산 의병의 중요 축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는 그의 외교활동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등청정의 진영에서 세 차례 강화회담이 열렸다. 제1차 및 제2차 회담에는 사명대사와 함께 이겸수가 참여했다. 그리고 제3차 회담에는 사명대사는 불참하고 이겸수가 대표로 참여했다.

제1차 강화회담을 위해, 사명대사와 이겸수는 1594년 4월12일 서생포 왜성으로 향했다. 대표단의 목적은 강화의 촉진에 있었다. 그러나 강화의 길은 멀기만 했다. 가등청정은 다음의 5개 조건을 내놓았다: 첫째 명의 황녀와 일본 천황이 혼인을 맺음, 둘째 조선의 땅을 갈라서 일본에 양도함, 셋째 전과 같이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함, 넷째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들여보내어 살게 함, 다섯째 조선 조정의 중신을 일본에 인질로 보냄. 이 내용은 『선조실록』에 기록되었다.

제2차 강화회담은 7월11일에 열렸다. 본회담에 앞서 이겸수와 희팔랑의 예비회담이 열렸다. 희팔랑은 가등청정이 총애하는 부하장수로, 이겸수의 상대역에 해당했다. 이 회담에서는 전쟁의 판도를 판가름할 극비사항이 논의되었다. 그 내용은 『분충서난록』에 직접화법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겸수는 소서행장과 심유경 사이에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실패할 것으로 전망하며,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이간하려 노력했다. 또한, 명의 지원을 받으면 귀족인 가등청정이 비천한 풍신수길을 치고 관백이 될 수 있다며 희팔랑을 부추겼다.

7월 12~13일 양일간 본회담이 열렸다. 일본의 5개 조건을 수용할 수 없으며 단지 셋째 조건 즉 통신사 파견을 재개하는 것은 고려하겠다는 것이 우리 측의 입장이었고, 가등청정은 분노하면서도 관심을 표명했다. 경상 좌병사의 장계를 통해 임금께 보고된 본회담의 결과는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본회담을 마친 13일의 한밤중에 희팔랑은 이겸수를 은밀히 자기 숙소로 초청했다. 본회담을 마무리하는 정리회담이 열린 셈이다. 모두 네 번의 문답이 있었는데, 그 내용도 『분충서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즈음, 당시 영의정이었던 류성룡은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을 분석함으로써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사이에 틈이 있음을 간파했다. 이에 따라 류성룡은 반간계를 고안했다. 소서행장이 가등청정의 공을 가로채려 한다는 말을 퍼뜨려 두 사람의 반목에서 어부지리를 얻자는 계책이었다.

반간계의 기획은 비변사의 몫이었다. 비변사는 2품 이상의 문관과 무관이 함께 참여해 군사방략을 협의하던 기관이었다. 오늘날의 전시 비상내각이다. 군국기무의 일급비밀인 반간계의 임무는 이겸수에게 맡겨졌고, 이는 『선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반간하는 계획을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이겸수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서 희팔랑 등에게 은밀하게 말하기를…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이겸수가 적진에 들어가 말할 구체적 내용을 경상감사가 기초함이 좋겠다는 것이 비변사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이를 경상감사에 맡기지 말고 비변사가 직접 기초해 올리도록 명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로 인식했던 것이다. 비변사가 기초한 내용을 임금이 읽은 다음, 이대로 시행하도록 이겸수에게 지시했다.

1594년 9월9일, 임금이 비변사에 물었다. 전시 상황이 급박하니 사명대사와 이겸수를 급히 상경시켜 상황을 청취함이 좋을까 의논하여 아뢰라는 것이었다. 사흘이 지난 9월12일, 비변사는 사명대사를 급히 상경시키자고 건의했는데, 임금은 이겸수도 함께 부르라고 명했다. 『선조실록』의 다음 기록은, 이겸수가 사명대사에 못지않은 비중을 가졌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유정으로 하여금 급히 올라오게 하여 적의 사정을 직접 물은 연후에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겸수도 함께 올라오도록 하라”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9월22일에 사명대사와 이겸수가 서울에 도착했고, 비변사는 이들에게서 청취한 정보를 분석하여 임금께 보고했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의승장(義僧將) 유정 및 이겸수가 들어왔다. 비변사가 적정(賊情)을 물어가지고 아뢰었다.”

제3차 강화회담은 그해 12월에 열렸다. 가등청정이 사명대사를 만나기를 거부함에 따라, 사명대사는 경주로 돌아가고 이겸수가 대표로 나갔다. 이겸수와 희팔랑의 회담은 이틀간 진행되었고, 그 결과를 사명대사가 정리하여 임금께 치계했다.

해가 바뀌고 또 바뀐 1596년. 조정에서는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을 두고 의논이 분분했다. 명의 사신이 파견되어 대마도에 도착했다는 첩보가 들어온 것이었다. 조정은 향후 강화교섭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누군가 대마도로 가서 상황을 탐지해야 했다. 누구를 보낼 것인지, 논의가 이어졌다.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자.

…상이 이르기를, “적의 정세를 탐지하고 싶다면 알맞은 사람을 가려서 보내라” 하자, 류성룡이 아뢰기를, “장희춘과 이겸수를 보낼만합니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비변사의 수장이었으며 이순신을 천거했던 영의정 류성룡이 이겸수를 추천한 것이다. 사명대사와 함께 가등청정과 담판했던 외교관. 풍신수길을 치도록 가등청정을 부추겼던 사내. 비변사가 기초한 반간계를 들고 서생포 왜성을 출입했던 ‘왕의 특사’. 선조임금이 “이겸수도 함께 올라오도록 하라”라며 기다렸던 울산사람. 왕조실록에서 스스로 빛나는 이 사람을 그간 우리 울산은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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