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최초의 문과 급제자 죽오 이근오
울산 최초의 문과 급제자 죽오 이근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02.2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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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이 《죽오 이근오 일기》 역주본을 발간했다. 이 일기는 인쇄된 책력인 시헌력(時憲曆)의 날짜 위나 상·하단에 초서체 한자로 기입했다. 1810년 전후 7년분과 1831년분, 1832년분 등 모두 2천707일의 일기다. 1804년부터 1832년까지 29년에 걸쳐있지만 20년분은 부존재 상황이다. 일기 내용으로 미루어 1831년분과 1832년분은 죽오의 아들이 썼을 가능성이 높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 끝에 이근오의 후손이 쓴 후지(後識)와 유사한 글이 수록되어 있어서 전수 과정을 개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기는 ‘개인 기록물’의 정수다. 개인의 구체적 일상이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는 수준을 넘어 점차 세분화, 세밀화되어가는 한국학 관련 연구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일기가 충무공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다. 이런 생활일기 유형의 글들이 주목받는 것은 당시 선비들의 생활사를 세세히 알 수 있다는 데 있다. 《죽오 이근오 일기》도 그 범주 안에 있다. 죽오 이근오(竹塢 李覲吾, 1760-1834)는 울산 출신 최초의 문과대과 급제자인 만큼 상징성이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다.

울산은 왜구의 출몰이 잦았던 곳이다. 이에 경상좌병영이 설치되는가 하면 수영, 성곽 등 관방시설이 정비되었다. 거기다가 임란 때는 울산 의사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그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향교가 복원되고 서원이 설립되는가 하면, 경북지역 명망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로 생원시나 진사시 입격자가 나오기 시작하다가 마침내 문과대과 급제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주인공인 죽오 이근오야말로 당시도, 지금도 참으로 자랑스러운 인물이다.

이근오는 웅촌면 석천리 출신이다. 충숙공 이예의 11세손으로, 근재공 고택의 첫 주인인 이의창의 차남이다. 백씨가 후사가 없어서 장남으로 입계시켰으니 종가도 죽오의 혈손들이 이어왔다. 1790년에 증광 문과에 급제, 15년여에 걸쳐 관직에 있었지만 실직(實職) 근무는 5년 미만이고, 최종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다. 죽오는 치암 남경희(1748-1812)와 깊이 교유했지만 도와 최남복(1759-1814)도 좋은 벗이었다. 스승은 치암의 아버지인 활산 남용만과 족형인 반계 이양오(1737-1811)이며, 경주부 내남, 보문, 양동 등지의 사족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일기에 나타난 죽오의 일상은 늘 바쁜 모습이다. 집안 건사며 조상 받드는 일, 자식을 비롯한 후학들 권학과 자신의 독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이 무척 다양하고 많다. 고을 관아, 향교나 서원, 양사재 등에도 발걸음이 잦았다. 만사나 제문, 상량문, 기우제문 등 글을 짓는 일도 빈번하다. 질병이 나서 고통을 겪는 모습도 나타난다. 밀양, 경주, 영천 등 멀리까지 나들이도 잦은데, 오가기가 만만찮았을 것이다. 먼 지방으로의 주유는 선비들의 이벤트성 여행 같다. 치부기는 추수기가 다수이나 노비 구입 관련 기록도 보인다.

《죽오집》이 1901년에 4권 2책으로 발간되었다. 이 문집에는 한시 133, 만시(晩詩) 21, 서(書) 53, 상량문·축문·제문묘비문 등 31, 부록 33 등 총 270여 편이 실려 있다.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것이다. 문집에 실린 글의 작성 시기나 배경을 일기가 명확히 하고 있으니 문집의 백 데이터인 셈이다. 《죽오집》이 발간된 지 80년만인 1981년에 <중간영인본>이 나왔다. 부록으로 과시(科試) 답안지인 ‘시권(試卷)’ 내용을 활자로 실었다. 요즘 같으면 사진으로 실어 죽오의 친필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다.

<중간영인본>에는 죽오의 생애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200자 원고지 80매 분량이니 얼마나 구체적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로 미루어 <중간영인본>이 나올 때만 하더라도 <죽오일기> 전질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오 같은 뛰어난 준재(俊才)도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21세에 외간상을 당했고, 34세에 백씨 내외를 잃었다. 36세에 내간상을 당했고, 하세 두 해 전인 1832년에 사자(嗣子)가 서른여섯 나이에 세상을 떴다. 옛사람들은 본인이 수(壽)를 누렸다 하더라도 애사를 겪은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죽오 이근오가 울산 향내에 끼친 영향은 크다. 후손들은 선조의 대를 이어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생원·진사가 3인이요, 문과 급제자가 1인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후손들 또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많다. 필자는 방조(傍祖)인 죽오 선조가 1813년에 지은 <양사재 상량문>을 집에 걸어놓고, 볼 때마다 글씨에 감복하고 있다. 선조는 향교나 서원의 기능이 약화되자 양사재(養士齋)를 설립하고 후학들에게 강학했다. “儒風丕新 士趨克正, 유학의 풍도가 크게 새로워지고, 선비의 태도가 능히 바르게 되며…….”

이정호 수필가·울산학포럼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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