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종실

▲ 세조가 조난사건의 처리를 명하는 실록기사, <세조실록> 세조6년 1월5일.

세조 국서 들고 통신사로 가던길에 대마도서 조난
일본국왕까지 수색 나섰지만 표류흔적조차 못찾아
대일외교 상흔 남기며 130여년간 통신사 발길 끊겨
수륙대재회 열었던 천룡사서 550년 뒤에도 법요식
오늘날 울산과 과거 교토를 잇는 연결고리로 자리

1460년(세조6) 정월 초사흘, 왕세자가 임금과 중궁에게 바치는 잔치가 막 시작하는 참이었다.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한을(韓乙)의 급보 때문이었다. 1459년(세조5) 10월8일 부산을 출항한 통신사 일행이 대마도 앞바다에서 풍랑으로 조난했다는 비보였다. 한을 자신을 제외한 일행 100여명 모두가 표류하여 행방불명이거나 익사했다는 것이다.(『세조실록』 세조6년 1월3일).

통신사 일행이 일본국왕(막부 쇼군)에 보내는 국서를 받들고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를 향해 서울을 떠난 것은 약 5개월 전이었다. ‘첨지중추원사 송처검을 일본국 통신사로 삼고, 행 호군 이종실을 부사로 삼고, 종부시 주부 이근을 서장관으로 삼아 예물을 가지고 일본국에 함께 가도록 하였다’(『세조실록』 세조5년 8월23일). 당시 이종실은 종3품 대호군의 품계에 있었으나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정4품 호군의 관직을 맡고 있었다.

▲ 이종실의 혼을 모신 단소.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

이종실은 울산사람이다. 아버지는 왕조실록에 나타난 최초의 울산사람으로, 조선왕조울산실록 첫 회에 소개된 충숙공 이예이다. 이예는 두 아들을 두었다. 이종실과 형제간인 이종근은 양근군수를 지났으며, 충청도관찰사와 대사간을 역임한 양희지의 장인이기도 하다. 두 형제로부터 벋어나온 후손들은 학성이씨 가문을 형성해 대대로 울산에서 살아왔다. 후손들은 임란에 창의한 의병으로, 사명대사를 도와 가등청정과 담판한 외교관으로, 남창지역 3·1만세운동을 이끈 항일투사로서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왔다.

사고를 보고받은 세조는 ‘이를 애도하여 드디어 명하여 잔치를 정지시키고’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내가 한을의 말을 듣고서 갑자기 조치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관리들을 보내 시체를 수색하고, 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라.” 여기서 치제라 함은 제사를 베푼다는 뜻이니, 수중고혼을 달래기 위한 수중 장사를 이르는 말이다.

이튿날 세조는 표류를 탐지하지 못한 죄를 물어 경상도관찰사 등을 문책했다. 그 다음 날에는 경상도·전라도·강원도·함길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 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일본 통신사(日本通信使)가 지난 기묘년 10월 초8일에 배로 떠났으나 풍랑을 만나서 정사 송처검이 탄 배는 간 곳을 알지 못하고, 부사 이종실의 배는 전복하여 패몰하였다. 바닷가에 있는 여러 고을 여러 포구로 하여금 후망하게 하여, 만약 표류하는 사람이 있거든 곡진히 구휼을 더하고, 시체를 발견하거든 간수하고 소홀히 하지 말게 하라”(『세조실록』 세조6년 1월5일).

조정은 한을을 구조해 준 대마도주에게 선물을 보내면서, 표류하는 배와 사람들을 끝까지 찾아서 보내주도록 당부하기도 했다(『세조실록』 세조6년 2월30일). 그러나 조난한 100여 명 중 어느 한 사람도 바다에서 생환하지 못했다. 비극은 이렇게 끝을 맺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대일외교사에 큰 상흔을 남겼고 조선 조정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조정에서 통신사 파견의 안건이 나오면 으레 조난사건이 화제에 올랐다. 파견에 찬성하는 쪽은 당시 조난은 규정을 어기며 짐을 많이 실었기 때문에 일어난 예외적 사건일 뿐이라 했다(『성종실록』 1477년(성종8) 10월12일). 반대론자는 조난사건에서 본 것처럼 위험이 너무 크다고 주장했다(『중종실록』 1522년(중종17) 2월3일). 반대론이 우세했던 것인지, 조난사건 이후 130여 년 동안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보내는 통신사의 발길이 뚝 끊겼다. 명 황제가 막부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한 것이 1403년이었다. 마지막으로 통신사를 파견한 1443년(세종25)까지 40년간,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대략 4년에 한번 꼴이었다.

통신사 파견이 재개된 것은 임란을 목전에 둔 1590년(선조23)이었다. 황윤길·김성일이 정사·부사로 참여한 것이 바로 이 사행이었다. 조난사건이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반대론자의 명분이 줄어들고 통신사가 더 자주 일본에 파견되었을까? 그래서 일본의 침략준비와 관련한 정보수집이 더 원활했을까. 그랬다면 풍신수길의 ‘관상’에 따라 임란의 정세판단이 좌우되는 추태를 막을 수 있었을까? 황윤길은 풍신수길을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으로 보았고, 반면에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된다’고 보고했다(『선조수정실록』 선조24년 3월1일).

조난사고로부터 약 4년이 지난 1463년(세조9) 7월14일, 일본국왕이 세조에게 보내는 국서가 도착했다. 일본국왕의 말이다. “폐하께서 첨지중추원사 송처검과 대호군 이종실을 보빙사자로 삼아 보내셨는데…바닷가 제국으로 나아가서 수색했으나 표류한 배를 발견하지는 못했으며 발견된 시체는 이미 장사지냈습니다. 또 우리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대재회(水陸大齋會)를 열어 송처검과 이종실의 명복을 빌어주었을 뿐입니다.” 수륙재(水陸齋)는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재(齋)를 뜻한다. 천룡선사는 오늘의 천룡사를 가리킨다. 일본 임제종의 본산으로,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웠다. 청수사, 금각사 등 교토 시내에 있는 12개의 사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천룡사도 그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하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2009년 10월8일은 조난사건으로부터 정확하게 550년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조난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법요식이 천룡사에서 열렸다. 일본국왕의 명으로 수륙대재회가 열렸던 바로 그 곳이었다. 천룡사 스님들, 이종실의 후손들, 한일관계사학회 학자들, 오사카 총영사가 참석했다. 일본측에서는 교토대학 교수, 교토조형예술대학 교수, 일본 다도(茶道)의 총본산인 우라센케(裏千家)의 대종장(大宗匠), 교토 국회의원, 교토문화박물관장 등이 참석했다. 천룡사는 정사 송처검과 부사 이종실의 위패를 만들었고, 아직도 천룡사 불단 옆에 봉안하고 있다.

100여명의 통신사 일행이 익사한 1459년 조난은 일찍이 유례가 없는 대사건이었다. 세조의 엄명에 따른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행의 시신은 끝내 수습할 수 없었다. 이종실의 후손들은 초혼장으로 설단(設壇)하여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 168-1번지에 혼을 모셨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250m 떨어진 곳에는 그의 재실인 고산재(高山齋)가 있다.

울산동헌에서 기관(記官)으로 근무하던 이예는 세종의 신임을 받아 대일외교에 종사했고 종2품의 중앙관직까지 올랐다. 대를 이어 통신사로 파견된 이종실은 아버지와 달리 실패한 외교관이었다. 그러나 이종실은 조선왕조실록에서 6개 기사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비중있게 다뤄졌다. 세조와 무로마찌 막부, 한국과 일본, 21세기 울산과 15세기 교토(천룡사)를 잇는 연결고리,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다. 비극에는 페이소스(pathos)가 있다. 실패한 역사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울산사람 이종실에 대해서도 울산이 이제 관심을 갖고 그의 역사를 기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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