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휴정가(二休亭家) 유물의 반가운 귀향
이휴정가(二休亭家) 유물의 반가운 귀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7.2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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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이 참으로 반가운 진품들을 품었다. 지난 7월 15일에 이휴정가(二休亭家)에서 보존해 오던 유물 1천700여 점이 기탁된 것이다. 이렇게 다량의 유물이 일괄 기탁된 일은 울산박물관 개관 이래 처음이다. 이 유물은 이휴정가(二休亭家)가 형성되던 350여 년 전부터 집적되어 왔다. 1975년 무렵, 종손 내외분이 연로해지자 서울에 살던 차종손(기탁자)과 합가하면서 이 유물들도 따라갔다가 45년여 만에 귀향한 것이다. 이휴정가는 울산 최초의 소과 합격자인 이휴정 이동영(李東英, 1645~1667)의 종손가로서, 기탁자 이증(李增)님은 10세손이다.

이번 유물의 귀향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유물 소유자는 원래 울산박물관에 기탁할 의사를 전달했다. 유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울산박물관이 인수 준비로 머뭇거리던 사이에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이를 알고 교섭한 결과 그쪽으로 기탁되었던 것이다. 2014년에 <국학자료목록집 17>이 간행되었는데, 필자는 최종 교정자로서 연구자들이 못 짚은 집안 내력과 지역성을 보완했다. 이휴정에서 보고회도 가졌는데, 행사 전반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보고 느낀 바가 무척 컸다.

그 다음해 2015년에는 ubc 다큐프로 제작이 있었다. 학성이씨 월진문중과 밀양박씨 송정문중이 오랜 세의를 담은 <강의계 360년의 우정>이라는 작품이다. 어느 날 촬영차 국학진흥원을 찾았는데, 그곳에 기탁된 이휴정가 유물 중 이휴정 선조(11대조)의 백패와 시권을 처음 대하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이휴정 공이 영천의 괴천 박창우(1646-1702) 공에게 울산으로의 이사를 권하여 1664년에 괴천 공도 울산 사람이 되었다. 1666(병오)년에는 소과에 동방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이듬해에 이휴정 공이 이승을 떠나면서 이별했다.

33세의 친구를 떠나보내는 괴천 공은 크게 상심했다. 그는 제문에서 두 사람 사이를 ‘이성골육(異姓骨肉)’이라고 표현하며 짧게 나눈 우정을 아쉬워했다. 제문의 ‘유희묘세상우 일견지허(遊戱妙歲相遇 一見知許)’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괴천 공이 10살이던 1655년에 경주부윤이 주관한 하과 시험에 장원하던 무렵에 사귐이 시작된 것으로 짐작한다. 괴천 공이 1702년에 눈을 감은 지 5년이 지난 1707년부터 ‘강의계(講誼契)’를 수계한 것으로 전하나 1938년에 계안(契案)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울산박물관은 이휴정가 유물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마침 문화시장을 표방한 송철호 시장이 기탁자를 설득하고 또 설득한 끝에 마침내 울산으로 돌아왔다. 기탁자는 다시 사양하던 기탁식을 시장에게 설득당하여 7월 20일에 가졌다. 필자는 기탁식을 갖기까지 기탁자의 마음고생을 지켜본 사람이다. 7월 14일에 양 기관 간 기탁유물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날, 국학진흥원 연구가들에게 미안함을 거듭 표했고, 그들은 엷게 웃으면서도 얼굴에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 읽혔다. 기탁자는 아마 지금은 마음이 편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는 울산박물관이 국학진흥원으로부터 전량 인수받는 모습을 확인하였다. 전체 유물 가운데 고서가 75권으로, 매우 적은 이유를 필자는 안다. 당시 종손이 서울 아들집으로 합가할 때, 고서 중 중요도가 높은 일부만 상경했던 것이다. 천 권도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고서들은 종가(온산 신밤마을) 대청에 머물러 있었다. 큰 독과 대나무상자 등에 보관되어 있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한 것은 1999년 2월경이다. 비슷한 또래 족친 몇이서 선영을 돌아보고 난 후 이휴정 할배 종가에 한 번 가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일행은 그렇게 해서 주인이 떠나고 없는 종가를 찾았다. 문간방에 집안 할매 한 분이 거처하고 있었고, 마침 그 집 아들이 와 있어서 허락을 받아 대청에 들어갔다. 전체를 열람할 상황이 아닌지라 <간우집>, <학고집> 등 방조(傍祖) 문집 몇 권을 빌려와서 복사본을 만들어 공유하였다. 1973년 1월에 처음으로 종가를 찾았을 때는 양반가의 규격을 갖춘 모습이었고, 종부 금호할매의 기품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두 번째 방문 몇 달 후 고택에 도둑이 들어서 고서를 비롯한 유품들이 모두 도난당한 일은 지금도 속이 많이 상한다.

일찍 세상을 떠난 이휴정 공은 학성이씨 월진문중의 중조이다. 손이 귀하던 집안에 세 아들을 낳아 후손 없이 더 일찍 떠난 백씨 뒤를 이었고, 무과에 급제(1665)한 후 한 해 먼저(1666) 떠난 아우의 후사도 이었다. 큰아들과 손자는 출사하여 당상관에 이르렀다. 증손 휘 여규는 청명과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8세손 휘 수일은 한주 이진상의 학맥을 이으며 남창 3·1만세의거를 발기하였다. 세월이 흘렀으매, 대를 이어 경북지방 명문가와 교류하면서 유물들을 전승시켜온 이휴정가 선조님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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