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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발자취

  chungsukgong
충숙공할아버지
작성자 이두병
작성일 2017-09-1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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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조선왕조실록 이예 李藝 검색 내용

  
이예 李藝 검색결과 
검색어 李藝 : 총 77건

1. 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1월 3일 병진 2번째기사 왜구의 괴수 상전과 어중 등이 울주의 지주사 이은과 반인 등을 잡아 도망가다
왜구(倭寇)의 괴수 상전(相田)·어중(於中) 등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울주포(蔚州浦)로 들어온 것을 지주사(知州事) 이은(李殷)이 식량을 주고 후히 접대하였더니, 상전 등은 〈도리어〉 꾀어서 함몰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이은(李殷)과 반인(伴人) 박청(朴靑), 기관(記官) 이예(李藝) 등을 잡아 가지고 도망해 돌아갔다.

2.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윤7월 3일 경신 5번째기사 이예가 일본에 포로로 잡혔던 남녀 70여 명을 데리고 오다
일본 회례관(日本回禮官) 이예(李藝)가 피로(被擄)되었던 남녀 70여 명을 추쇄(推刷)하여 돌아왔다.

3. 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5월 13일 기묘 3번째기사 전 호군 이예를 대마도의 종정무에게 보내 미두를 후히 하사하다
전(前) 호군(護軍) 이예(李藝)를 보내어 대마도(對馬島)에 가게 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종정무(宗貞茂)에게 글을 보내기를, "매양 들으니, 수호(修好)에 뜻을 오로지하고 항상 도적을 금하게 한다 하니, 어찌 감히 감사한 것을 알지 못하겠는가? 이에 조미(造米) 1백 50석과 콩[黃豆] 1백 50석을 배를 갖추어 실어 보내, 신(信)을 표(表)하는 바이다." 하였다. 이때에 종정무가 평도전(平道全)에게 글[書]을 통하여 말하기를, "조선(朝鮮)에서 우리에게 향(向)한 정성(精誠)이 지금 예전만 못하다. 예전에는 쌀 5,6백 석을 보냈는데, 지금은 보내지 않는다. 너도 휴가(休暇)를 청하여 나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임금이 듣고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게 하여, 마침내 이예(李藝)를 보내어 후사(厚賜)한 것이다.

4. 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1월 27일 경신 4번째기사 왜에 잡혀 유구로 팔려간 자를 쇄환하기 위해 전 호군 이예를 유구국에 파견하다
전 호군(護軍) 이예(李藝)를 유구국(琉球國)으로 보냈다. 임금이 본국 사람으로서 왜(倭)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 간 자가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명하여 이예를 보내어 쇄환(刷還)하도록 요청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유구국은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며, 또 이제 사람을 보내면 번거롭고 비용도 대단히 많이 드니, 파견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정은 본래 귀천(貴賤)이 다름이 없다. 가령 귀척(貴戚)의 집에서 이같이 피로(被擄)된 자가 있다면, 어찌 번거롭고 비용드는 것을 따지겠는가?"

5. 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7월 23일 임자 1번째기사 왜구에 잡혀 유구국에 팔린 44인을 데리고 통신관 전 호군 이예가 돌아오다
유구국(琉球國) 통신관(通信官) 전 호군(護軍) 이예(李藝)가 돌아왔는데,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왜구(倭寇)에게 잡혀가서 유구국에 팔려 넘어간 사람 44인을 추쇄(推刷)하여 왔다. 전언충(全彦忠)이라는 자는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사람인데, 을해년(乙亥年)에 나이 14세에 잡히어 팔려갔다가 지금 이예를 따라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모두 죽었었다. 그 부모의 상(喪)을 추후(追後)하여 입으려 하자, 임금이 불쌍히 여기어 겹옷 두 벌, 홑옷 한 벌, 정오승포(正五升布) 10필과 쌀·콩 아울러 15석을 하사하여 보냈다.

6.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4월 24일 갑진 2번째기사 일본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죽으니 이예를 보내어 치제하다
일본(日本)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죽으니, 행 사직(行司直) 이예(李藝)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이어서 쌀·콩, 종이를 부의(賻儀)하였다. 종정무가 대마도에 있을 동안에 위엄이 여러 도(島)에 행하여지고 우리 국가(國家)를 향하여 충성하고 여러 도적을 금제(禁制)하여 자주 변경(邊境)을 침입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특별히 후사(厚賜)한 것이다.

7.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8월 14일 신묘 8번째기사 대마도 경차관 이예가 무쇠로 화통 완구를 만들어 볼 것을 아뢰다
대마도 경차관(對馬島敬差官) 이예(李藝)가 계(啓)하기를, "화통 완구(火㷁碗口)는 오직 동철(銅鐵)로 부어 만드는 것이온데, 동철이 우리 나라에서 나지 아니하므로 화통 완구를 만들기가 쉽지 아니하온데, 신(臣)이 대마도에 갔을 때에 왜적의 집에서 중국에서 무쇠로 부어 만든 화통 완구를 얻어 가지고 왔사오니, 청컨대, 무쇠로 화통 완구를 부어 만들어 각 주(州)와 진(鎭)에 나누어 두고 군기감(軍器監)에 명하여 시험케 하소서." 하였다.

8. 세종실록 1권, 세종 즉위년 9월 2일 기유 8번째기사 일본 대마주 수호 대영이 토산물을 바치고 부의 보내 준 것에 감사하다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예조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전자(前者)에 경차관(敬差官) 이예(李藝)를 보내시어 정무(貞茂)의 죽음에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하여 주셨음을 도도웅와(都都熊瓦)는 감격하여 마지 않나이다." 고 하니, 판서(判書)는 답서하여 이르기를, "전자에 이예를 보내어 부의를 전하게 하였으나 물건이 변변치 않았는데, 이제 멀리서 감사하는 뜻을 보이니...

9.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1월 17일 신사 2번째기사 상왕이 양화도에 거둥하여 전함을 관람하다
먼저 떠나가게 한 후, 득민과 대호군 최해산(崔海山)과 군기 부정(軍器副正) 이예(李藝)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각기 배 1척씩 타고 쫓아가는데, 득민의 배가 항상 앞서게 되어 경첩(輕捷)하고 빠르기가 왜선보다 나았다. 수군들에게 주식(酒食)과 정포(正布)를 차등 있게 내려 주고, 드디어 서이궁(西離宮)에 거둥하였다. 임금이 서이궁에 나아가 술을 마련하였는데, 효령 대군...

10. 세종실록 18권, 세종 4년 12월 20일 계묘 3번째기사 일본 회례사 박희중 등에게 옷 등을 하사하고 국서를 내리다
일본 회례사(回禮使) 박희중(朴熙中)과 부사(副使) 이예(李藝) 등이 길을 떠나니, 각각 옷 한 벌씩과 모관(毛冠)·갓[笠]·신[靴]과 약품을 내리고, 서장관(書狀官)인 봉례랑(奉禮郞) 오경지(吳敬之)와 통사(通事) 윤인보(尹仁甫) 등에게 각각 모의관(毛衣冠)·갓·신을 내렸다. 국서(國書)에, "조선 국왕은 일본 국왕 전하에게 회답한다. 바다와 하늘이 멀고 넓어서, 소식이 오랫동안...

11. 세종실록 22권, 세종 5년 12월 4일 신해 2번째기사 일본국 회례사로 갔던 직제학 박희중이 복명하다
일본국에 회례사(回禮使)로 갔던 직제학(直提學) 박희중(朴熙中)·부사(副使) 호군 이예(李藝)가 돌아와서 복명하였다.

12.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1월 5일 임오 5번째기사 직제학 박희중 등을 보내 일본 사신들에게 식사하게 하였으나 먹지 아니하다
직제학(直提學) 박희중(朴熙中)·호군(護軍) 이예(李藝)·윤인보(尹仁甫) 등을 보내어 규주(圭籌)와 범령(梵齡)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였으나, 역시 먹지 아니하였다.

13.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1월 6일 계미 1번째기사 박희중 등에 명하여 일본 사신들에게 식사하게 하니 그제야 먹다
박희중·이예·윤인보 등에게 명하여 규주(圭籌)와 범령(梵齡)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경판(經板)을 얻지 못한다 하여 음식을 끊고 먹지 아니하나, 경판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이 음식을 먹고 안 먹는 데에 달린 것이 아니요, 너희들이 사신이 되어 한 가지라도 뜻에 맞지 아니하면 경솔하게도 주림을 참으며 트집을 하려 하니, 어찌 사신된 체통이라 하겠는가." 하고 , 이어서...

14.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1월 14일 신묘 1번째기사 예조에서 일본국 회례사와 부사에게 비단 겹옷 한 벌씩을 지어 주기를 청하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이제 일본국 회례사(回禮使)와 부사(副使)에게 비단 겹옷[裌衣] 한 벌씩을 지어 주소서." 하고 청하니, 이예(李藝)에게 목면(木緜) 겹옷 두 벌을 더 지어 주라고 명하였다.

15.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7일 계축 3번째기사 일본 회례사 판선공감사 박안신 등에게 선물과 함께 답신을 보내다
일본 회례사(回禮使)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이 배사(拜辭)하니, 임금이 안신(安臣)과 예(藝) 등을 인견(引見)하고 각기 옷 한 벌과 갓과 신을 내려 주고, 종사관(從事官) 공달(孔達)과 최고음(崔古音)·박침(朴忱)에게도 또한 옷 한 벌과 갓과 신을 내렸다. 또 특히 공달에게는 쌀 10석을 내려 주었다. 안신 등이 일본...

16.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2월 7일 계축 4번째기사 일본 구주 전 도원수 원도진·대내전 다다량공에게 보낸 예조 참판 이명덕의 서신
우리 전하께서도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박안신(朴安臣)과 호익 시위사(虎翼侍衛司)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 등의 관원을 회례(回禮)로 보내니 배를 내어 호송하여 주기 바라오. 토산물로 면주(緜紬) 5필, 저포(苧布) 5필, 채화석(彩花席) 10장, 표피(豹皮) 1장, 호피(虎皮) 2장을 보내니 받아들이기 바라오." 하고, 예조 참의 성개(成槪)가 축전주(筑前州) 태재부 소경(太宰府少卿)...

17. 세종실록 23권, 세종 6년 3월 26일 임인 1번째기사 직제학 박희중의 죄를 탄핵하자는 좌사간 박관 등의 상소문
겨우 예조에 알리면서도 오히려 실지대로 하지 아니하였고, 또 윤인시(尹仁始)와 이예(李藝) 등으로 하여금 그들의 욕심대로 할 것을 본받게 하였으니, 이는 비록 시정(市井)의 무리들도 오히려 차마 하지 못할 일이거늘, 하물며 글 읽은 유신(儒臣)으로서 타국에 사신으로 가서 행동이 너무나 염치없었고, 더욱이 도적질까지 하여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18.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2월 17일 무오 3번째기사 일본국 회례사 박안신과 이예를 내전에 불러 접견하다
일본국 회례사(回禮使) 상호군(上護軍) 박안신(朴安臣)과 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가 복명(復命)하였는데, 임금이 내전에 불러 들여 접견하였다. 안신이 계하기를, "신 등이 처음에 적간관(赤間關)에 이르자 규주(圭籌)가 국서(國書)를 등사하여 급히 어소(御所)에 보고하였는데, 55일이나 기다리고 있어도 회보(回報)가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신 등 이 괴이하게 여겨...

19.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1월 25일 경신 3번째기사 소이전 구주 절도사 대마도 종언칠·언육의 가족 등에게 양곡·과일 등을 내리다
소이전 구주 절도사 대마도 종언칠(宗彦七)·언육(彦六)의 어머니와 그 할머니와 좌위문대랑 등에게 내리는 술과 과일과 양곡을 이번에 돌아가는 삼미삼보라(三未三甫羅)에게 부쳐 보내도록 명하였으니, 대호군 이예(李藝)가 계한 바에 의한 것이었다.

20.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2월 9일 계유 6번째기사 귀향을 청하는 귀화 왜인 부사직 지문에게 의복과 쌀 등을 내리다
귀화한 왜인인 부사직(副司直) 지문(池文)이 말씀을 올리기를, "신은 부모를 버리고 처자와 헤어진 지 지금 8년이 되었습니다. 그리워하는 정은 이루 말할 수 없사오니, 관압사(管押使)인 이예(李藝)를 따라서 고향인 대마도에 가서 여러 해 동안 그리워하던 정회를 풀어 주시기 바라나이다."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고, 인하여 의복 두 벌과 갓·신·술· 쌀을 내렸다.

21.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 2월 12일 병자 1번째기사 석견주·대마도의 사물 관압사 대호군 이예가 사조하니 인견하다
석견주(石見州)·대마도(對馬島)의 사물 관압사(賜物管押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가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종정무(宗貞茂)는 지성으로 마음을 바쳤기 때문에, 부왕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항상 보호를 베푸셨는데, 정무가 죽은 뒤에 그 섬의 도둑들은 〈이때까지〉 보호하여 준 은혜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틈을 타서 좀도둑질을 감행하고 있음은 그대도...

22.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5월 21일 갑인 2번째기사 대마도에 다녀온 석견주의 사물 관압사 대호군 이예가 복명하며 올린 계문
석견주(石見州)의 사물 관압사(賜物管押使)인 대호군 이예(李藝)가 복명하여 계하기를, "종정성(宗貞盛)은 예(禮)를 갖추어 명령을 맞았으며, 내리신 부물(賻物)을 받고는 신 등을 대접함에 심히 후하여 45리(里)나 되는 훈라관(訓羅串)까지 나와 전송(餞送)하면서, 신(臣)에게 이르기를, ‘신이 마땅히 선부(先父) 정무(貞茂)의 뜻을 계승해서 귀화(歸化)에 전 심하였어야 되는데,...

23.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27일 을묘 4번째기사 대마도의 종우마·언륙·정성이 단목 등을 바치니 정포 등을 내려 주다
환도(環刀) 2자루, 단목(丹木) 3백 근, 석유황(石硫黃) 5백 근, 화살촉 30개를 바치고, 대호군(對護軍) 이예(李藝)를 통하여 호피(虎皮)·표피(豹皮)·채화석(彩花席)·세포(細布) 및 미두(米豆)를 구하므로, 정포(正布) 70필을 회사(回賜)하고, 특별히 미두(米豆) 각 1백 석, 호피 ·표피 각 2장[領], 저포(紵布) 20필, 잡채화석(雜彩花席) 30장, 소주(燒酒) 30병, 송자(松子) 5석을 내려 주었다.

24.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6월 26일 정미 1번째기사 명나라에 세자의 양관을 청하는 문제 등에 대해서 논의하다
마땅히 금은을 사는 일을 주달하여야 되겠다. ’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 원민생으로 하여금 견문하 고 오도록 하라. 일찍이 들으니, 일본국에는 금을 생산하고 은은 생산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회례사(回禮使) 이예(李藝)를 불러서 그런가 아닌가를 묻고, 만약 금을 생산한다면 금값을 회례사에게 부쳐 보내어 사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25.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1월 26일 갑술 3번째기사 일본의 대내전과 소이전에 물건을 보내게 하다
나라를 섬겨 왜적(倭賊)의 무리들을 금제(禁制)하였고, 무자년에 통신 부사(通信副使) 이예(李藝)가 해상에서 바람을 만나 석견주(石見州)에 표류하여 사경(死境)에 이른 것을, 대내전이 진심(盡心)으로 구호하였으며, 식량 40 석과 배값으로 돈 1백 관(貫)을 주어 선척을 수리하여 호송하였고, 매양 본국의 사신의 행차를 당하면 해적들이 출몰하는 요해처를 모두 호송하게...

26.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2월 7일 갑신 2번째기사 신주의 사위 하례와 전주의 치제를 위해 일본 통신사들이 길을 떠나다
일본 통신사 대사성(大司成) 박서생(朴瑞生)·부사(副使) 대호군(大護軍) 이예(李藝)·서장관 전 부교리(副校理) 김극유(金克柔)가 길을 떠나는데, 신주(新主)의 사위(嗣位)를 하례하고 전주(前主)에게 치제(致祭)하기 위함이었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이제 구주(九州)에서 온 사객으로 인하여 비로소 새로 큰 명을 받아 위호(位號)를 바로함을 알았는데, 기쁘고 경사로운...

27.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2월 7일 갑신 3번째기사 박서생·이예 등에게 단자의 등을 내리다
박서생(朴瑞生)·이예(李藝)에게 각기 단자의(段子衣) 1습(襲)과 주의(紬衣) 1습을 내리고, 또 따로 의(衣)와 갓·신을 하사하였으며, 종사관 등의 옷도 하사하였다.

28. 세종실록 48권, 세종 12년 5월 19일 무오 3번째기사 예조에서 각 포구의 병선과 군기를 점검할 것을 건의하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대호군 이예(李藝)의 말에 ‘일본의 대내전(大內殿)이 일찍이 소이전(小二殿)과 싸워서 소이전의 축전주(筑前州) 땅을 빼앗으니, 어소(御所)에서도 이에 그 땅을 주고 또 글을 내려 주어 이르기를, 「일기주(一岐州)가 만약 서로 싸워 통일이 없으면 너희가 아울러 빼앗음이 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좌지전(佐志殿)이 이미 대내전에게 귀순하였 는데,...

29.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7월 7일 을사 4번째기사 형조에서 일본인과 사사로이 저포 등과 금을 바꾼 통사 윤인보의 처벌을 건의하다
도(徒) 1년에 처하고, 금공(金工) 김생(金生)은 그의 수종(隨從)으로서 장 1백에 처하고 물품을 추징(追徵)하여 입관(入官)시키되, 인보에게 2푼, 김생에게는 1푼을 징수하게 하며, 통신사와 부사(副使) 박서생(朴瑞生)·이예(李藝)는 이를 능히 살피지 못하였사오니 태(笞) 40에 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되, 김생은 2등을 감하게 하고, 이예와 박서생은 논하지 말게 하였다.

30.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7월 26일 임오 1번째기사 상호군 이예와 호군 김구경을 보내어 일본에 회빙하다
상호군(上護軍) 이예(李藝)와 호군(護軍) 김구경(金久冏)을 보내어 일본에 회빙(回聘)하였다. 일본 국왕에게 답하는 서신에 말하기를, "우리 두 나라는 대대로 인국(隣國)의 호의(好誼)를 닦아 항상 신의를 돈독히 했는데, 지금 또 전사(專使)로 보빙(報聘)하니 매우 기쁘고 위로되오. 선사한 예물은 삼가 이미 영수(領受)하였으며, 이에 신하 이예(李藝) 등을 보내어 가서...

31.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3월 27일 경진 2번째기사 예조 참의 윤수가 대마주 태수 종정성에게 회례사의 배를 분발하여 호송할 것을 치서하다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종정성(宗貞盛)에게 치서(致書)하기를, "이제 듣건대, ‘회례사(回禮使) 이예(李藝) 등이 돌아오는 배가 바다에서 도둑에게 약탈을 당하여,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겨우 목숨만 보전하여 적간관(赤間關)에 머물러 있다. ’고 하므로, 곧 갖추 계달(啓達)하여 좌군 부사정(左軍副司正) 피상의(皮尙宜) 를 임명해 보내어 옷과 양식을 가져다 주게...

32. 세종실록 60권, 세종 15년 6월 7일 무자 2번째기사 일본 회례 부사 김구경이 해적선에 관해 상언하다
이르러, 통사 김원(金元)을 왜왕(倭王)에게 보내어 호소하게 하였는데, 상호군 이예(李藝)와 종사관 방구성(房九成) 등 16명은 〈적간관에〉 머물러서 기다리게 하고, 구경(久冏)과 압물관(押物官 )은 반종인(伴從人)과 군인 합계 75명을 거느리고 대내(大內)·대우(大友)·소이전(小二殿) 등 여러 사람의 호송하는 힘을 얻어 5월 24일에 대마도로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33. 세종실록 61권, 세종 15년 8월 17일 정유 5번째기사 황희·맹사성과 일본에 갔던 회례사 이예·김구경 등의 위로 방법에 대해 의논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황희와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일본에 갔던 회례사 이예와 부사 김구경 및 종사관과 수행하던 사람과 격군(格軍)들이 해중에서 도적을 만나서 다행히 목숨은 보존하여 돌아왔으나 진실로 딱한 일이니,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원래 관직이 있는 자는 모두 가자(加資)를 해 주고, 관직이 없는 자는 부사정(副司正)을 제수 하고,...

34.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 10월 6일 을묘 4번째기사 해적에게 빼앗긴 물건 문제로 회례사 이예가 일본에 갔다 돌아와 보고하다
회례사(回禮使) 이예(李藝)가 일본에서 돌아와서 아뢰기를, "해적(海賊)을 만난 뒤에 빼앗긴 물건을 자세히 기록하여 통사(通事) 김원(金元)을 시켜서 돌아가 일본 국왕(日本國王)에게 사뢰게 하였더니, 국왕이 매우 성내어 모든 섬의 대관(大官)에게 수색하여 찾아서 수송하라고 명령하고, 또 대내전(大內殿)에게 명령하여 전적으로 맡아서 규찰하게 하였습니다. 대내전 은 그때...

35. 세종실록 63권, 세종 16년 1월 12일 경인 7번째기사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김구경이 면주 등을 강탈당한 보고를 늦게 한 죄를 들어 의금부에 가두다
당초에 직예문관(直藝文館) 김구경(金久冏)이 이예(李藝)와 같이 일본으로 사명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이제 와서 김구경이 윤대하는 자리에서 아뢰기를, "앞서 박다(博多)에 도착하여 이예가 본래 잘 아는 왜인의 면주(綿紬)를 많이 싣고 갔사온데, 그 면주가 폭이 넓고 값도 중하기 때문에, 본국의 면주는 값이 없어서 광견과 칠(漆)을 사지 못하였사오며, 돌 아오는 길에...

36.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4월 22일 기사 6번째기사 왜인 도성자·정대랑·이야이랑 등에게 면주와 미두 등을 주어 이예를 도와 준 사례를 하다
"왜인 도성자(道性子)·정대랑(井大郞)·이야이랑(伊也二郞) 등은 지난 계축년에 회례사(回禮使)로 간 이예(李藝)에게 배를 꾸며 준 자들입니다. 지금 도성자와 정대랑이 왔사오니, 도성자에게는 면주(緜紬) 20필을, 정대랑에게는 미두(米豆)를 합하여 20석을 내려 주시고, 아직 나오지 못한 소대랑(小大郞)·이야이랑(伊也二郞) 등에게 도 상공할 물건을 뒤에 왕래하는 사람이...

37.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5월 11일 정해 2번째기사 이예·김구경의 추핵 문제를 논의하다
정분(鄭苯)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 등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이제 이예(李藝)·김구경(金久冏)을 가두어 두고 추핵하고 있으나, 일이 사전(赦前)에 있었는지라 그만두고 추핵하지 아니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타국(他國)에 사신으로 가서 범한 일은 추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예(李藝)·김구경(金久冏)은 돌아 온 지 여러 달이 되었는데도...

38.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6월 8일 계축 4번째기사 김구경과 이예의 처벌에 관해 의금부에서 아뢰다v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직예문관(直藝文館) 김구경(金久冏)이 일본 회례 부사(日本回禮副使)로서, 정사(正使) 이예(李藝)가 범한 것이라고 말을 얽어 위에 아뢰고, 또 군량을 보충하는 돈[軍糧補添錢文]으로 속향(束香)과 백철(白鐵)을 사서 사사로이 쓰고, 진주(眞珠)와 금박(金薄)과 은박(銀薄)을 사들였는데, ‘이것은 진상(進上)하기 위하여 샀다. ’고 일컫고 는 말을 돌이켜...

39.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4월 11일 갑자 2번째기사 이예로 첨지중추원사를 삼아 대마도에 파견하다
이예(李藝)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삼아 대마주(對馬州)에 파견하였다. 예조에서 종정성(宗貞盛)에게 글을 보내기를, "영락(永樂) 20년에 본조 판서 신상(申商)이 공경히 왕지(王旨)를 받들기를, ‘대마도가 우리 나라 남단에 위치해 있으면서 은덕을 저버리고 누차 변지를 번거롭게 하므로, 이미 변장(邊將)으로 하여금 가서 그 죄를 물어 정벌케 하여 포로 를...

40.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6월 13일 을축 1번째기사 정부에 왜인의 체류를 제한하는 문제를 상의하여 계달하게 하다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만약 헌의자의 말을 좇게 되면 약소한 무리를 사랑해야 하는 대의에 어긋날 것이요, 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고만 힘쓴다면 국가의 용도가 부족할 것이 염려되니 어찌하면 되겠는가. 난만상의(爛漫相議)하여 계달하라."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예(李藝)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숙의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1.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9월 13일 갑오 3번째기사 예조로 하여금 의정부의 대신 및 첨지중추원사 이예와 더불어 대마주 왜인의 접대에 관한 사목을 의논하게 하다
예조로 하여금 의정부의 대신 및 첨지중추원사 이예(李藝)와 더불어 대마주(對馬州) 왜인의 접대에 관한 사목(事目)을 의논하게 하니, 예는 의논하기를, "왜인이 가지고 온 물건이 30바리[駄] 이하는 10일간 유관(留館)하게 하고, 40바리 이상은 20일간 머무르게 하며, 80바리 이상은 30일간 머무르게 하여, 이것으로 그 유관(留館)의 기한으로 삼게 하옵소 서." 하고, 예조 참판...

42. 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9월 18일 기해 2번째기사 의정부에서 종정성의 문인이 없는 왜인의 접대는 허락하지 말도록 할 것을 아뢰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금번에 이예(李藝)를 파견하여 대마주(對馬州)에 가서 종정성(宗貞盛)과 더불어 이미 약속을 정하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이제부터 대마주의 종언칠(宗彦七)·종언차랑(宗彦次郞)·종무직(宗茂直)과, 만호(萬戶) 조전(早田)·육랑차랑(六郞次郞), 그리고 일기(一岐)의 지좌전(志佐殿)·좌지전(佐志殿)과, 구주(九州)의 전평전(田平殿)·대우전( 大友殿)과,...

43. 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0월 18일 기사 2번째기사 예조에서 진강차랑 편으로 종정성에 글을 보내다
전에 경차관(敬差官) 이예(李藝)가 대마도에 도착하여 종정성(宗貞盛)의 공손한 약속을 받고 돌아올 때에는, 진강차랑 좌위문(津江次郞左衛門)으로 하여금 행차를 보호하게 하고 이에 토산물을 바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진강차랑 좌위문이 하직하니 예조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이 앞서 국가에서 경차관 이예를 보내어서 안부를 묻게 하였더니 족하(足下)가 정성 을...

44.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3월 23일 신미 2번째기사 이예가 왜인 대내전과 통교하기를 아뢰다
첨지중추원사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신이 계축년에 일본으로 사신갔다가 돌아올 때에 해적을 만나서 진상하는 방물과 서류와 군인의 의복까지 다 약탈당하였고, 간신히 대내전(大內殿)에 이르니, 대내전이 술과 밥을 주고 또 빼앗겼던 것을 찾아서 주었습니다. 그의 조부 때부터 한마음으로 정성을 바쳤으니, 사신을 보내어 통신하게 하옵소서." 하매, 예조에 내려 의정 부와...

45.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4월 18일 을미 6번째기사 이예가 왜인들의 위조 서계의 문제를 말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이르기를, "왜인(倭人)으로서 종정성(宗貞盛)·종언칠(宗彦七)·종무직(宗茂直) 등의 서계(書契)를 받아서 오는 자들을 신이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대마도 사람만이 아니오며, 간혹 농업을 일삼지 아니하고 도둑질로 업을 삼다가 대마도의 배에 부탁하여 오는 자가 있습니다. 만약 좌지전(佐志殿)·지좌전(志佐殿)·살마주(薩摩州...

46.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5월 11일 무오 3번째기사 왜인의 서계의 진위를 상고하도록 하는 문제와 무역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종정성(宗貞盛)이 대내전(大內殿)에게 구주(九州)를 빼앗기고 대마도에 도망하여 와서, 오로지 성상의 은덕을 입으면서 안심하고 붙어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많은 폐단을 일으켜 한 달 동안에 보내는 사람이 거의 수천 명에 이르니, 한도 있는 물건으로 한정없는 사절을 대접하자면 장래가 걱정스럽...

47.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9월 10일 을묘 5번째기사 왜인 진강차랑의 말한 바를 의논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신이 진강차랑(津江次郞)에게 이르기를, ‘종정성(宗貞盛) 등이 본도(本島)에 편안히 살면서 그 생(生)을 즐기는 것은 오로지 우리 나라의 은덕인데, 이것을 돌보지 않고 석견주(石見州) 등처의 잡인(雜人)을 모두 서계(書契)를 주어서 보내니, 이것은 장원(長遠)한 계책이 아니요, 또 종공(宗公)이 혹 본도( 本島)에 편안히...

48.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9월 29일 갑술 4번째기사 이예가 진강차랑의 말을 전하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진강차랑(津江次郞)이 말하기를, ‘우리 도주(島主)가 보낸 사람 중에 도서(圖書)를 두번 찍은 서계(書契)를 가진 자는 바다를 건널 10일의 양식을 주고, 도서를 한 번 찍은 서계를 가진 자는 3, 4일이나, 혹은 5, 6일의 양식을 주는 것은 역시 대국(大國)의 명령이라.’ 하였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세 번 도서를 찍은 것을...

49. 세종실록 87권, 세종 21년 10월 21일 병신 2번째기사 예조에서 종정성에게 불필요한 사신과 장사치에게는 접대하지 않겠다는 치서를 보내다
어려운가 하오. 그러니 금후로는 무릇 인물 내보내는 것을, 일체 전년에 경차관 이예(李藝)와 정한 약조에 의한다면, 사신으로 나오는 것이 족하(足下)의 조부 때와 다름이 없을 것이오. 귀주(貴州)를 연휼(憐恤)하는 뜻도 종시(終始)가 여일한 것이오. 그 행하여야 할 사목을 아래와 같이 갖추 어 기록하오. 1. 경중에다 팔아야 할 구리·납·유황·단목 등 잡물을 가지고 온 사람은...

50. 세종실록 87권, 세종 21년 10월 29일 갑진 2번째기사 내이포 왜인들이 부당하게 양식 청하는 것을 금하게 하다
"내이포(乃而浦)에 항상 사는 왜인 쇄모이라(灑毛而羅) 등 6인이 첨지중추원사 이예(李藝)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식을 청하였사온데, 그 포구에 머무르는 동안의 식량과 바다를 건너가는 식량을 대·중·소선을 분간하여 준다는 것이 이미 법으로 세워졌으므로, 사사로이 서면을 보내어 청구하옵는 것은 실로 부당하오니, 이제부터 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옵고, 만약 부득이한...

51. 세종실록 88권, 세종 22년 2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첨지중추원사 이예를 보내 부산포 왜인을 추쇄하게 하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첩정에 의하여 아뢰기를, "부산포(富山浦)에 와서 사는 왜인(倭人) 등이 요(料)를 받고자 꾀하고, 거짓 말하기를, ‘이번에 임온(林溫)의 아들 이라(而羅) 등의 뱃사공이 왔다.’ 하오니, 첨지중추원사 이예(李藝)를 보내어 추쇄(推刷)하여 송환하게 하옵고, 그 모람(冒濫)된 사유를 종정성(宗貞盛)에게 편지하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 다.

52. 세종실록 88권, 세종 22년 3월 22일 갑자 2번째기사 첨지중추원사 이예가 대 왜인정책에 대해 아뢰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종언칠(宗彦七)·종무직(宗茂直)이 보낸 왜인 등이 그 받아들이[接納]지 않는 것을 알고서 마음속으로 분원(憤怨)을 품고 말이 퍽 불손(不遜)하와, 그 마음을 측량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에는, 만약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면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죽고 사는 것을 돌보지 아니하는 무리들이 여러 도적들과...

53.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2월 9일 병자 3번째기사 첨지중추원사 이예가 왜국 소이전에 신사 파견을 아뢰다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아뢰기를, "이제 왜국(倭國)의 소식[聲息]을 들었사온데, 특별히 신사(信使)를 소이전(小二殿)에게 보내어 치례(致禮)함이 옳겠습니다. 종정성(宗貞盛)에게도 마땅히 후한 예(禮)로써 대접할 것이오나, 연변의 주군(州郡)과 제주(濟州)에는 더욱 계엄(戒嚴)을 가하여 불우(不虞)의 변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정부에서 의논하여...

54. 세종실록 100권, 세종 25년 6월 22일 을사 2번째기사 이예가 대마도의 사신으로 갈 것을 자청하다
예조 참판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이제 대마도(對馬島)에 사신을 보내어 피로(被虜)된 사람들을 쇄환(刷還)하려고 하시는데, 신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에 출입하여 이 섬의 사람과 사정을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신이 가면 저 섬의 사람들이 기꺼이 만나볼 것이며, 누가 감히 사실 을...

55.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7월 7일 경신 2번째기사 황희·신개·하연 등과 일본에 잡혀간 사람들을 찾아올 방도를 의논하다
불러 이르기를, "전일에 이예(李藝)를 불러서 윤인소(尹仁紹)가 회환(回還)하기 전에 먼저 대마도(對馬島)에 가는 것의 편부(便否)를 물으니, 예(藝)가 대답하기를, ‘인소(仁紹)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마땅히 먼저 가는 것이 옳겠으나, 노략질해 간 인물(人物)이 대마도에 있으면...

56.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7월 17일 경오 3번째기사 대마주 체찰사 이예가 하직하다 대마주 체찰사(對馬州體察使) 이예(李藝)가 하직하였다.

57.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7월 22일 을해 2번째기사 신하들과 의논하여 강권선과 금구랑을 일기주에 사신으로 보내고 등구랑으로 하여금 소오예 등을 만나보게 하다
가서 가만히 인물을 찾아 돌려보낼 것을 계획하게 하고, 계속해서 이예(李藝) 등을 보내어 대마도에 가서 포로되어 간 인물과 적왜를 수색하게 하고, 만일 찾지 못하게 되면 그때에 일기(一岐)에 가서 의리를 들어 타이르고 다 찾아오는 것이 실로 편익(便益)할 것이옵니다. 이제 권선을 보내서 구랑과 함께 갔다가 혹시 성공하더라도 대국(大國)의 사신(使臣)이라는 체면에...

58.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0월 13일 갑오 2번째기사 통신사 변효문이 돌아와 일본에서의 일을 치계하다
하여 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두세 번 쇄환하기를 청하였으니, 그 공이 작지 않다. 청하건대, 세 사람은 머물러 두 어 나에게 바치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성심이 대단히 두터우니 내가 마땅히 계달하겠다. 그대 스스로 바칠 필요는 없다.’ 하였으나, 정성(貞盛)이 굳이 청하므로, 세 사람을 머물러 두어 체찰사 이예(李藝)에게 부탁하고 왔습니다." 하였다.

59.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0월 24일 을사 2번째기사 대마도 체찰사 이예 등이 적왜를 잡아오다
경상도 관찰사가 치계(馳啓)하기를,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 이예(李藝)와 종정성(宗貞盛)이 보낸 진강차랑(津江次郞) 등이 적왜(賊倭)를 잡아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다.

60.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1일 임자 1번째기사 대마도 체찰사 이예가 적왜를 잡아 돌아오다
대마도 체찰사 이예(李藝)가 돌아와 경상도 선산부(善山府)에 도착하여 치계(馳啓)하기를, "종정성(宗貞盛)이 적왜(賊倭) 시라사야문(時羅沙也文) 등 13명을 수색하여 잡아서 신 등에게 주고, 정성(貞盛)과 여러 추장(酋長)이 진강차랑(津江次郞) 등 아홉 사람을 보내어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적왜 1명은 수색하여 잡을 때에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으므로 머리를 베 어 왔고, 또...

61.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1일 임자 2번째기사 종정성의 관하가 사로잡아 간 중국 군사 서성을 이예에게 부쳐 보내다
종정성(宗貞盛)의 관하가 일찍이 중국 절강(浙江) 창국위(昌國衛)의 군사 서성(徐成)을 사로잡아 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성이 이예(李藝)에게 부쳐 보냈다.

62.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5일 병진 1번째기사 이예로 중추원 부사를 삼고 모순에게 두 자급을 가하여 적왜를 잡은 것을 치하하다
이예(李藝)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삼고, 모순(牟恂)은 두 자급(資級)을 가하였으니, 적왜(賊倭)를 잡은 것을 상준 것이었다.

63.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7일 무오 1번째기사 이예를 따라 일본에서 온 중국인 서성을 돌려보낼 것인지를 의논하다
임금이 글로 승정원(承政院)에 내어 보이기를, "체찰사 이예(李藝)가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자, 중국인(中國人)인 서성(徐成)이란 자가 따라오기를 청하매, 예가 거절하기를, ‘도주(島主)의 말을 듣지 않고 데리고 가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그 사람이 도주(島主)에게 청하여 도주가 서계(書契)를 만들어 주어 부송(付送)하였다. 지금 갑(甲)이 의논하기를, ‘통신하고 체찰한...

64.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1월 15일 병인 2번째기사 대마도 체찰사 이예가 와서 복명하다 대마도 체찰사 이예(李藝)가 와서 복명(復命)하였다.

65.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27일 정미 2번째기사 요동 도사에 자문을 보내어 이예가 대마도에서 데리고 나온 절강 사람 서성에 대해 말하다
붙들어 갔으므로, 이 때문에 본부에서 아룁니다.’ 하므로, 첨지중추원사 이예(李藝) 등을 차송하여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체방(體訪)하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예(李藝)의 장정(狀呈)에 의거하면, ‘왜적에게 잡혀 간 인구를 체심(體尋)하라는 명령을 받들고 대마도에 갔다 돌아왔사온데, 인하여 일찍이 사로잡 혀 갔던 절강인(浙江人) 서성(徐成)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66.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일 임오 1번째기사 주문사 병조 참판 신인손을 북경에 보내 제주 관선을 침범, 약탈한 왜구를 압송하여 중국으로 보냄을 아뢰다
여자 합하여 7명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고 아뢰므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예(李藝)를 차견하여 왜산(倭山)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도주(島主)에게 타일러 잡혀 간 인 구를 쇄환(刷還)하고, 인하여 도적의 무리를 찾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 본년(本年) 11월 11일에 이예(李藝)가 회보한 정문에 의거하면, ‘왜산(倭山)에 이르러 도주(島主)에게 설유하여 잡혀 갔던 남녀를...

67.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5일 을유 4번째기사 종정성이 왜구를 돌려 보낼 것을 청하면 명나라에서 청하여 어쩔 수 없이 보냈다고 하게 하다
돌려보내지 아니 하오면, 후일에 변고가 생길까 또한 염려됩니다. ’고 한다. 이예(李藝) 등이 국가의 뜻을 제멋대로 짐작하여 그저 이르기를, ‘어찌 모두 죽일 것이냐.’ 하고, 처음에는 이런 말이 없다가 이제와서 이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 실수한 것을 책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예의 말이 이와 같으니 대신(大臣)이 알지 않을 수 없고, 또 대사(大事)는 이미...

68. 세종실록 104권, 세종 26년 5월 18일 정묘 3번째기사 통신사 이예와 김구경을 구호한 적의 괴수 평좌위문 등에게 쌀·의복·갓 등을 하사하다
명하여 의정부와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아뢰게 하니, 모두가 아뢰기를, "제주(濟州)를 지났다는 일은 모르는 체하되, 통신사 이예(李藝)와 김구경(金久冏)을 구호한 공만을 기록하여 의복·갓·목화[靴]와 쌀 10석을 급여할 것이며, 중미탄정 등에게도 의복·갓·목화를 구례에 의하여 주게 할 것이나, 그들 중 시위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들어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9. 세종실록 107권, 세종 27년 2월 23일 정묘 2번째기사 동지중추원사 이예의 졸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이예(李藝)가 졸(卒)하였다.
예는 울산군의 아전이었었는데, 홍무(洪武) 병자년 12월에 왜적 비구로고(非舊老古) 등이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降服)을 청하거늘, 경상도 감사가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 이은(李殷)을 시켜서 관(館)에서 접대를 맡아보게 하고, 사실을 갖추어서 위에 알리니,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여 오랫동안 결정 짓지 못하고...

70. 세종실록 108권, 세종 27년 5월 9일 임오 3번째기사 사표국을 두어 염초 제조를 시험하게 하다
오래이나, 일찍이 당인(唐人)을 사로잡고서 비로소 화포(火砲)의 법을 알았다. 전에 이예(李藝)가 일본에 갔을 적에 화포를 가지고 맞 이하였으나, 화기(火氣)가 세지 못하여 예에게 염초를 청하니, 예가 없다고 대답하였는데, 오늘날의 염초장(焰硝匠)은 본디 천례(賤隷)인지라, 만약 이(利)로 꾀이면 반드시 그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 하물며, 염초의 약은 모두 저들에게 나오니...

71.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4월 7일 임오 1번째기사 대마도 경차관 원효연이 대마도의 일을 치계하다
장차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니 , 대답하기를, ‘앞서 첨지(僉知) 이예(李藝)와 상장(上將) 윤인보(尹仁甫)가 왕래할 때에는 비록 50척으로 약정하였으나, 무릇 사송선(使送船)은 수(數)의 내외(內外)를 묻지 않고 모두 접대를 허락하였는데, 이예 등이 죽은 뒤부터 수의 내외를 가리기 시작하여, 비록 특송인(特送人)과 호군(護軍)이라 하더라도 역시 접대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72.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24일 정유 1번째기사 겸판예조사 강맹경 등이 왜 호군 등구랑에게 구주의 토지·부락에 관하여 묻다
그들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는 아직 자세히 모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옛날 이예(李藝)가 대내전과 소이전이 서로 싸울 때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日本)으로 갔는데, 조선(朝鮮)에서 사명을 받들고 온 사람이라 하여 침범하지 않고 호송하였다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모든 섬에서 지성껏 그 성의(誠意)를 보이고 있으므로, 비록 일본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있다...

73. 성종실록 56권, 성종 6년 6월 4일 신사 1번째기사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문제에 관해 신하들과 논의하다
간절하므로, 마지못하여 송처검(宋處儉)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倭)로서 향화(向化)한 이예(李藝)의 아들 이종실(李宗實)이 수로(水路)를 알므로 같이 보 내게 되었습니다. 이종실이 양식과 물건을 탐내어 배에 실은 것이 매우 무거웠고, 또 날씨가 순조롭지 못하여 송처검이 출발하지 아니하고자 하였으나, 이종실이 송처검에게 술을 권하여 그가 취한 틈을 타서 홑이불로...

74. 성종실록 59권, 성종 6년 9월 14일 경신 1번째기사 예조에서 일본 사신에게 알아듣게 타이르다
통신(通信)하지 않다가, 지난 기해년에 귀국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에, 이예(李藝)·윤인보(尹仁保) 등을 보내어 비로소 통신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빈번하게 신사(信使)를 보내었 으되, 귀국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경(藏經)·조연(助緣) 등의 일은 모두 우리 나라의 청(請)대로 따르고, 이제 유독 따르지 않으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75. 성종실록 184권, 성종 16년 10월 7일 갑신 4번째기사 사인 원숙의 서간을 보고 후추의 종자를 구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도록 전교하다
있는 나라를 찾아가서 명년에 궐하(闕下)에 내조하겠습니다. 정통(正統) 4년에 이예(李藝)가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올 때에 배와 돛대를 수선하여 송환하 였고, 동(同) 5년에 선군(船軍) 김연(金延)을 장주(長州) 적간관(赤間關)에 머물게 하였다가 동년에 고득종(高得宗)이 왔을 때에 부치어 돌려보냈으며, 동(同) 8년에 허후(許詡)를 보내어 신의 조부(祖父) 지세래(持世來)를 제사...

76. 선조실록 199권, 선조 39년 5월 28일 을미 4번째기사 광국 공신 황정욱이 일본에 갈 사신으로 자신의 아들 황혁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다
전일 시끄러웠던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고려 때에 이예(李藝)는 세 번이나 일본에 들어갔고 정몽주(鄭夢周)는 두 번 일본에 들어갔습니다. 그때에도 어찌 사신을 보내고 싶어서였습니까. 그저 상황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전했습니다. 가령 저 적들이 옛날처럼 뻣뻣하게 구는 데에 노하여 죽이고자 하더라도...

77.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7월 26일 양력 1번째기사 송익필 등 28명에게 시호를 주다
증 영의정(贈領議政) 최숙생(崔淑生)에게 문정(文貞), 고(故)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예(李藝)에게 충숙(忠肅), 고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에게 문숙(文肅), 고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에게 익헌(翼獻), 고 통제사(統制使) 민제장(閔濟章)에게 충장(忠壯), 고 하녕군(河寧君) 이양(李穰)에게 충민(忠愍), 고 도총관(都總管) 서명서(徐命瑞)에게 정간(貞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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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2018년 조선통신사 영천 재연행사 이두병 2018-10-12 18
99 조선통신사 행열 부산행사 영상자료 1 이오걸 2018-07-17 255
98 (사진)2018년 5월 5일 조선통신사 가장행렬 행사 이두병 2018-05-23 405
97 박현모의 세종이 펼친 ‘진짜 정치’ 이두병 2018-05-05 498
96 [조선왕조실록]속 최초의 울산사람 ‘이예’ 조선초 왜구억제 일등공신 경상일보 2018-05-01 353
95 뮤지컬 '이예 그 불멸의 길' 사진 이두병 2018-01-04 814
94 충숙공 이예선생 관련 학술대회 이두병 2017-12-05 669
93 충숙공 이예선생 관련 발간도서 이두병 2017-12-05 382
92 충숙공 이예선생 주제의 한시 이두병 2017-12-05 506
91 충숙공 이예선생 초상화 이두병 2017-12-05 423
90 내가 제작한 KBS 역사스페셜(역사스페셜 제작자) 이두병 2017-11-27 694
89 조선통신사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 이두병 2017-11-03 569
88 '이예 그 불멸의 길'뮤지컬 관련 사진 이두병 2017-11-01 702
87 10월27~28일 공연한 '이예 그 불멸의 길'뮤지컬 관련 신문보도 내용 이두병 2017-11-01 628
86 [기고]이예로(李藝路)가 가장 좋겠다 경상일보 2017-09-29 627
85 [시론 칼럼] ‘이예로’를 울산 역사의 스토리텔링 소재로 울산매일 2017-09-29 616
84 옥동 농소간 신설도로 '이예로' 명명 경과보고 이두병 2017-09-29 695
83 울산 옥동∼농소 신설 도로명 '이예로' 준공식 일정 이두병 2017-09-26 1011
82 디지털 조선왕조실록 이예 李藝 검색 내용 이두병 2017-09-14 450
81 울산광역시교육지원청 "역사인물탐구 교재자료 공급" 이두병 2017-08-28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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