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역력(歷歷)히'의 의미
서울 서초동 국립외교원 뜰에 ‘외교 달인’ 두 명의 동상이 있다. 한 명은 고려 때 거란 침략을 물리친 서희(徐熙), 다른 한 명은 조선시대 왜구 침입을 근절한 이예(李藝)다. 서희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지만 이예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 초 최고의 통신사로 40여 차례 일본을 오가며 조선인 포로 667명을 구해 오는 등 대일 외교의 선봉에 선 사람이다.

그가 24세 때인 1397년, 왜구 3000여 명이 울주에 침입해 노략질하고 군수를 사로잡아 갔다. 중인 신분의 아전이었던 그는 왜구의 배에 숨어 적지까지 따라가서 군수를 호위해 왜구를 감복시켰다. 이듬해 귀환해 전문 외교관이 된 이후 평생 동안 수많은 왜적을 막고 피랍 백성을 고국으로 데려왔다.

지방 아전에서 종2품 벼슬까지 오른 뒤 70세에도 사행(使行)을 자처했다. ‘계해조약’으로 평화의 기틀을 다졌고, ‘대장경’을 전했으며,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를 들여오는 등 문화·경제 교류에도 힘썼다. 아들까지 외교 전문가로 키웠다. 그 결과 태조~세종 60년간 184회나 침입했던 왜구는 그의 아들 대까지 조선을 넘보지 못했다.

그는 외교의 목적이 국익 증진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문 지식과 지략, 강경책과 회유책을 번갈아 쓰며 양국에 평화를 안착시켰다. ‘세 닢 주고 집을 사고, 천 냥 주고 이웃을 산다’는 옛말처럼 인접 국가 간 선린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로써 세종 시대의 국가 부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역사(歷史)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마땅히 옛일에서 배우고 체득한 것을 행해야 한다. 한자 ‘지날 력(歷)’은 뜻을 나타내는 ‘그칠 지(止)’와 음을 나타내는 ‘책력 력()’을 합친 글자다. 걸음을 멈추고 옛일을 깊이 생각하면 발자취가 선명히 보인다. 이를 또렷이 보여주는 말이 ‘역력(歷歷)히’다. 역(歷)자가 두 개나 겹쳤으니 또렷하고도 또렷하게 역사에서 배우라는 것이다.

‘외교 천재’ 서희도 역사적 교훈을 중시했다. 하급 관리가 잘못된 외교를 지적하다 임금의 노여움을 샀을 때 “제가 재상 자리를 잘못 차지하고 할 일을 못 해서 일어난 일이므로 벌은 제게 주고 그에게는 표창을 주소서”라고 했다.

외교 문제로 나라 안팎이 시끄럽다. 600년 전, 1000년 전 역사에서 배우고 새겨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역력히’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