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천추사, 충숙공 이예(李藝)
불멸의 천추사, 충숙공 이예(李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0.03.17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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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에 ≪대외교류를 통해 본 울산≫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대곡박물관에서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학술회의 결과물 등을 모은 자료집이다. 고대 울산지역의 대외교류에서부터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 다섯 편의 논문과 발굴유적으로 본 사진도 같이 엮어놓았다. 오늘날은 울산의 바다와 항만을 통해 울산 사람들이 만든 대형 선박들과 자동차들이 세계를 누비고 있다. 또 전량 수입한 원유를 가공하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석유제품들이 수출되고 있음도 일찍이 울산의 대외교류 역사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필자는 두 가지 논문에 주목하였다. 우인수 교수가 쓴 <조선전기 울산의 대외교류>와 이근우 교수가 쓴 <울산의 인물 이예와 대외교류>가 그것이다. 울산 출신의 인물인 ‘충숙공 이예’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울산의 대외교류가 기원 전후부터 시작되었다는 흔적들은 많다. 신암리와 우봉리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비롯하여 교동리와 신화리, 중산동, 창평동, 대대리, 연자도, 반구동 유적 등이 그것이다. 울산은 철의 공급자 역할을 겸하면서 신라의 외항으로 성장하였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조선 초기에 염포가 개항되었다.

조선은 1404년(태종 4)에 일본과 통교를 맺었다. 통일신라 때 국교 단절 이래 550여년 만이었는데, 조선은 왜구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인식했다. 고려 말의 왜구 폐해가 컸기에 왜구의 금압이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 속에 생겨난 삼포는 두 나라의 공식적 교역 장소였다. 삼포 중 하나였던 염포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이 울산에 있었기에 지정되었을 것이다. 이즈음 울산에서는 ‘이예(李藝, 1373-1445)’라는 인물이 대일 외교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각종 자료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예’는 조선 초의 무신이자 외교관이다.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며, 학성이씨의 시조이다. 그는 중인 계급에 속하는 향리였으나 공을 세워 벼슬길로 나갔다. 세종 때 삼포조약 체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 양국의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 등에 큰 업적을 남겼다.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1419) 때는 중군병마부수가 되어 크게 활약했다. 세종의 명으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일본의 자전물레방아와 무쇠로 만든 대포를 조선에 들여오는 등 두 나라간 문화교류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마지막 사행은 1443년(세종 25)년이었다. 왜구가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으므로 그가 자청하여 대마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28세이던 1400년에서 71세이던 1443년까지 40여회에 걸쳐 임금의 사절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44년간의 사행에서 ‘이예’가 쇄환해온 조선인 포로의 수가 66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공로로 정2품인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 자리까지 올랐다. 아들 ‘이종실(?-1459)’도 대일 외교에 일생을 바쳤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일본 사행 길에 나섰다가 조난으로 수중고혼이 되었다.

후손들은 저마다 조상의 빛난 위업을 가슴에 품어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영남 동부지역 의병의 중심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남창지역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학파 이예’를 선생으로 기리는 추모지소도 건립되었다. ‘용연사(龍淵祠)’가 1737년(영조 13)에 황용연 건너편에 창건되었다가 1782년(정조 6)에 웅촌으로 옮겨 세워지면서 사호를 ‘석계(石溪)’라 하였다. 지금은 옛 ‘용연사’ 유허지에 복원한 ‘용연서원’에서는 기일인 음력 2월 23일에, 웅촌 석천리에 복원한 ‘석계서원’에서는 음력 9월 9일에 매년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예’의 선양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005년 2월에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면서 대마도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2010년에는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되면서 울산 문화공원과 서울 국립외교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조선 초기 외교사행 관련 학술대회가 수차례 진행되었다. 도로도 공을 기리는 의미를 담은 ‘이예로’와 ‘통신사로’로 명명되었다. 후손인 이충호 작가가 쓴 ≪이예, 그 불멸의 길≫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도 무대를 달구었다. 20세손인 필자는 조상님의 575주기를 맞으면서 졸문이나마 축원의 글을 올리고자 한다.

“불멸의 천추사(千秋史), 우리 조상님의 충(忠)은 해를 관통하고, 성(誠)은 하늘에 통했습니다. 조상님의 그 담대함이 40여회 넘나든 바다를 잠재웠습니다. 능소능대한 지략은 섬으로 이웃하는 왜(倭)를 감복시켰습니다. 대를 이은 통신사 수행 길은 몸 바쳐 위국진충의 표상이 되셨습니다. 제손(諸孫)들의 꽃다운 향사(享祀), 다함이 없을지니, 연연세세 올리는 양 서원의 향화(香火)도 영원할 것입니다. 선양(宣揚)함에 미진할지라도 정성으로 모시오니, 아 우러를 만세의 존령이시여, 기꺼이 흠향하시옵소서.”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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