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8일, 이종실 순직 550주기를 맞아 일본 천룡선사에서 열린 법요식(수륙대재회).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 외교관, 정치인과 이종실의 후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김병길 주필

통신사 이예선생, 4차례 조선왕 국서 일왕에 전달
그의 아들 이종실 1459년 국서 지니고 가다 풍랑만나 순직
작년 선양회 발족, 울산 사람들 ‘비운의 외교관’ 잊지 말아야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조선 왕조가 교린 정책의 하나로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인 것은 분명하다. 정치적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경제 활동은 물론 때로는 일본 사회에 막중한 영향을 미친 문화사절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 창업(1392년) 후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기 위해 승려 강규가 일본에 파견된 일이 있었다. 이후 1493년(세종 5) 3회째 떠난 조선통신사의 정사는 변효문(卞孝文)이고 서장관은 신숙주였다.
그때 신숙주가, 교토에 머물면서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뿐만이 아니라 당시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의 지리 풍속 방언까지를 세세히 기록, 오늘날 일본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
1592년(선조25)에 김성일, 황윤길 등이 통신사의 정·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하지만 그들이 본 일본정세가 서로 달라 조선왕조는 전대미문의 침략전쟁에 시달리기도 했다. 
국가원수 사이의 친서는 국가 간 외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021년 3월 북한 매체는 김정은-시진핑이 친서를 교환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2018년 트럼프는 김정은의 친서가 들어 있는 큰 봉투를 공개하면서 북한 김영철과 포즈를 취했다.
조선 시대에 일본과는 교린의 외교 관계에 있었다. 조선국왕과 일본국왕 사이의 친서는 국서로 불렸다. 그 국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통신사가 맡았다. 
두 나라가 교환한 국서의 내용은 상당 부분 왕조실록 혹은 통신사들의 사행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서의 실물은 귀하다. 조선국왕이 보낸 국서는 1642년(인조21)과 1655년(효종)의 국서만 실물로 남아있다. 모두 도쿄국립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일본 국왕이 조선에 보낸 국서는 실물로 남아있는 것이 없다. 
명나라는 1403년, 1404년에 조선국왕과 일본국왕을 각각 책봉했다. 그 후 1811년까지 25회에 걸쳐 조선국왕은 일본국왕(막부 쇼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하게 된다. 물론 통신사가 갈 때마다 국서를 전달했다.
울산은 이 국서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중 5차례는 국서를 지니고 일본으로 향했던 통신사가 울산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충숙공 이예는 4차례에 걸쳐 조선국왕 국서를 일본국왕에게 전달하고 돌아와 임금께 복명했다. 나머지 한 차례 국서 전달 통신사는 이예의 아들인 이종실이었다.  
하지만 이종실은 일본국왕에게 국서를 전달하지 못했다. 일본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순직했기 때문이다. 
1459년(세조5) 10월에 출항한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났다. 100명의 일행 중 기적적으로 수군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순직했다. 이종실은 통신사 부사(副使)였으며 정사(正使)는 송처검이었다. 
당시 통신사 일행이 간직하고 가던 국서의 내용은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조선국왕은 일본왕께 서신을 올립니다. 가을날이 서늘한데 편안히 잘 지내신다 하니 위안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 더불어 영토가 서로 잇닿아 있으며 대대로 이웃의 정의를 돈독히 하며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463년(세조9) 일본국왕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국서를 전했다. 순직한 조선통신사 부사 이종실 등 일행의 참변 내용과 위로의 말이 담겨 있었다.
“이웃한 귀국으로부터 오는 소식이 근년에 드물어지고, 하늘은 멀고 바다는 막혔으니 목마르게 바라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닷가 제국에 나아가 끝까지 찾아보았으나, 아무도 그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표류한 배를 돌려보낼 수도 없었고 시신의 장례를 치러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천룡선사(天龍禪寺)에 명하여 수륙대재회(水陸大齋會)를 베풀어 두 사람의 명복을 빌도록 했을 뿐입니다…”
수륙대재회는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혼을 위로하는 재’를 말한다. 천룡선사는 일본 임제종의 본산으로 당시 막부를 개창한 쇼군이 세운 사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10만평에 이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그 천룡선사가 통신사 정사 송처검과 부사 이종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세조는 예관을 보내 이종실의 초혼장을 치르게 했다. 그 혼백을 지금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의 단소(壇所)에 모시고있다. 2020년에는 ‘조선시대 통신사 이종실’이라는 추모비가 울산광역시장 이름으로 건립되어 그의 영혼을 위로했다. 
조선시대 뛰어난 외교관 이예가 여러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후 다양한 기념 사업이 진행되어 왔다. 반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가다 풍랑을 만나 순직한 그의 아들 이종실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이가 많다. 다행히 작년에 ‘조선시대 통신사 이종실 선양회’가 발족했다. 앞으로 그를 선양하고 추모하는 일은 울산사람들의 몫이다. 그는 한·일 두나라가 함께 기억하고 추모해야할 ‘비운의 외교관’이다. 지역의 역사인물을 선양하는 일은 울산 사람의 자긍심을 높이고 후대에 까지 전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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