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기록] 이예, 왜구가 잡아간 조선인을 구하라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기사승인 : 2023-03-18 00: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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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인물, 이예(李藝, 1373~ 1445)선생을 아시나요? 울산 시민이라면, 지난해 개통한 도로의 명칭 ‘이예로’를 통해 들어보셨을 테지요. 이예로의 쭉 뻗은 도로만큼이나 속 시원한 외교 능력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이예는 조선 세종 때의 전문 외교관으로서 일본과의 외교를 주도했습니다. 우리 정부의 한일 외교에 대해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 이 시기에 되돌아볼 만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이예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출신이었습니다. 이예가 태어난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습니다. 공민왕(1330~1374) 시기에는 115회, 우왕(1375~1389) 때는 더 심해져서 378회나 침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예의 어머니도 왜구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이예가 8살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일본으로 어머니를 찾으러 가기도 했지만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지요. 어린 시절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던 이예는 25살에 왜구에 붙잡혀간 울산 군수를 구하게 됩니다. 군수와 함께 대마도까지 자진하여 잡혀갔고 끝내 군수와 함께 울산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벼슬을 얻어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그는 71세의 고령이 되어서까지도 수 차례 일본을 왕래하며 포로로 잡혀갔던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 시켰습니다.

이예가 구한 사람들은 군수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1416년 태종 임금은 왜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에 팔려간 조선인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이예를 보내어 송환을 요청하려고 했습니다. 유구국은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유구국은 수로가 험하고 멀며, 비용도 대단히 많이 드는 일이라며 파견을 말렸습니다. 이에 임금이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정은 본래 귀천이 다름이 없다. 가령 귀척의 집에서 이같이 피로된 자가 있다면, 어찌 번거롭고 비용 드는 것을 따지겠는가?”라고 말하고 이예를 파견했지요. 이예도 유구국까지의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왜구에게 잡혀가서 유구국으로 팔려 넘어간 사람 44명을 구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는 43년간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오가며 외교관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최초의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문화를 교류하기도 하고, 쓰시마 정벌에서도 크게 활약했습니다. 왜구의 위협을 제거함과 동시에 평화적인 국제 관계를 유지하는 외교 능력을 보여주었지요. 특히, 1443년(세종 25년)에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에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를 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계해약조가 체결된 이후에는 왜구의 침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백성들의 고통이 크게 줄었습니다. 그리고 계해약조로 성립한 외교 체제는 조선 후기의 대일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예의 외교력이 필요한 요즘입니다. 이예 선생처럼 미래의 국제 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며 후손들의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외교 활동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는 외교를 통해 평화로운 국제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동시에 왜구에게 잡혀간 수많은 백성을 구했습니다. 외교관으로서 전문 지식을 갖춘 것은 물론이며 무엇보다 백성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백성을 구하는 데는 귀천이 없었고, 비용과 수고로움도 감수했습니다.

지금의 우리 대일 외교는 어떤지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누구의 마음에 공감하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까요. 일제에 잡혀갔던 몸은 돌아왔지만 찢긴 마음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예 선생님이 계신다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그 마음들을 먼저 구해내는 것이 외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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