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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두병
작성일 2017-10-13 (금) 13:33
https://goo.gl/iQTdZJ
ㆍ추천: 0  ㆍ조회: 958    
IP: 121.xxx.49
매천 야록(매천 황현 黃玹 1855-1910)
매천 야록(매천 황현 黃玹 1855-1910)
 
1. 서론(緖論)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선생은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합병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다. 매천사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사당건물과 유물관 등이 남아 있는데 주목할만한 유형의 문화재는 없다. 유물로는 매천선생의 가죽신, 벼루, 연수, 지구위, 도장, 병풍, 교지, 초상화와 서책 1,300여권이 보존되어있다. l962년(문화재청의 자료는 1955년) 매천의 후손과 제자, 그리고 지역의 유림들이 선생의 정신을 기려 세운 사당으로 1984. 2. 9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37호로 지정돼 있으며 매년 3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난 황현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종 20년(1883) 왕의 특명에 의해 실시된 보거과 첫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었는데, 시골사람이라는 불합리한 이유로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난 사실을 알고서 잇달아 있는 시험을 모두 내쳐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는 못하여 고종 25년(1888) 생원회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 고종의 어려운 정치, 명성황후의 독점적인 세도정치 등 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구례로 내려와 역사와 경세학 등 독서와 시문 짓기에 열중하였다.

 
  그 사이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이듬해 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어지러운 세태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등의 책으로 남겼다.

 
  특히 <매천야록>은 황현선생을 더욱 유명하게 한 책으로 흥선대원군이 정치권력을 잡을 때인 1864년부터 대한제국이 망한 1910년까지 47년간에 걸친 이 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이 10세대의 사실부터 듣고 본 것을 기록한 셈인데 그 자료는 대부분 1874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들은 것과 31세 이후 구례 광의면 월곡리에 은거하면서 듣고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를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하고 책의 맨 앞에서 당쟁의 폐해를 논하고 사대부의 타락한 모습을 지적했다.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을 여기에서부터 찾았다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야사이지만 자결로 자신의 뜻을 보인 자신의 기개만큼 논조가 냉철하다.

 
  그러나 이 글이 선생 사후에 바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 필사부본이 상해에 있던 김택영과 남원읍 방정식에 전해져 조선사편찬회에 알려졌을 뿐 원본이 숨겨져 일제기를 지냈다가 해방이 된 그 후 유족 황유현에 의해 국사편찬위에 전해져 빛을 본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한국사료총서 제 1집으로 이「매천야록」을 펴낸 것을 보더라도 이 야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청의 남명 조식선생과 함께 지리산의 동서쪽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가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지경을 바라보면서 무력감과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절명시 4편을 유서처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던 것이다.

 
2. 절명시(絶命詩)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어 허옇게 센 머리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죽고자 했어도 죽지 못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나) 오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 앞의 촛불이 하늘을 비추누나
 
妖氣晻翳帝星移(요기암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큰 별이 옮겨지니

九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대궐은 침침하여 시간 또한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복유) 이제는 조칙을 다시 받을 길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천만 줄기 눈물만 쏟아지는구나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는데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우리세상 없어졌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말을 생각해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배운 사람 구실이 이처럼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내 일찍이 나라 위해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부시충) 내 죽음 겨우 인을 이룰 뿐 충을 이루진 못했어라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이제 겨우 윤곡1)처럼 죽음에 거칠 뿐
當時愧不攝陳東(당시괴부섭진동) 그때의 진동2)처럼 나라 위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절명시에 들어 있는 그의 심정은 그가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남긴 유서

ꡐ유자제서ꡑ(遺子弟書)를 봐도 알 수 있다. 

ꡒ내가 죽어야 할 의리가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지 5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는 하늘이 내린 본성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성인의 글을 읽은 바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길이 잠들고자 한다. 이는 진실로 통쾌한 일이니 너희들은 슬퍼만 하지 말라.3)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세 덩어리의 아편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편을 먹기 전 세 차례 망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우국, 순국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저서 ꡒ매천야록ꡓ과ꡒ오하기문ꡓ등에서 그는 잠시도 나라 사랑과 나라 걱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히 애국열사의 표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1910년 9월 7일 새벽.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8월 29일)의 비보를 들은 지도 1주일이 지났다. 아편 세 덩어리를 앞에 두고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시름에 빠진 매천(梅泉) 황현(黃玹). 이미 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명시(絶命詩) 4수(首)를 써놓은 상태다. 저승을 코앞에 둔 그의 생각은 시구(詩句) 그대로 천고(千古)를 돌아볼 만큼 깊기만 하다.

 
ꡒ이 아편 덩어리들을 삼키기만 하면 이제 저 세상이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그런데 진정 이것을 삼켜야 하는 것일까. 죽을 수 있을까.ꡓ망국(亡國)의 한을 달랠 길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생을 끝내는 마지막 시까지 써 놓았건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손은 쉽게 아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편을 손에 들고 입에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몇 차례. 그러다 결국 소주와 함께 그것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ꡐ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다니….ꡑ

 
  선비로서, 사대부로서 매천은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매천은 죽음에 이르렀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지난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으로 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몸은 허해질대로 허해져 아편 기운은 금세 몸을 휘감고 돌았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깼다를 반복한 것도 여러 번. 그는 하루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보내다 결국 다음날 아침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쉰다섯. 역사가로서, 시인으로서 한창 완숙미를 뽐낼 때였다.
 
  죽기 직전 가족들은 통곡하며 그를 살리려 애썼지만 매천은 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 그는 동생 황원(黃瑗)에게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ꡒ아우야,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떼었다를 세 차례나 했다. 선비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했구나.ꡓ

 
3.ꡒ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ꡓ

 
 
   나라를 잃은 선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가 남긴 4수의 절명시(絶命詩)에는 슬픔, 고통, 절망,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ꡒ대궐이 침침하고 어둡다ꡓ(九闕沈沈晝漏遲)고도 했고ꡒ해맑은 종이에 천가닥 눈물이 난다ꡓ(琳琅一紙淚千絲琳)고도 했다.ꡒ나라 위한 벼슬아치가 아니니(曾無支廈半椽功) 이 죽음은 도리일 뿐 충일 수 없다ꡓ(只是成仁不是忠)는 시구도 있다.
  녹(祿)을 먹는 자가 그렇게 많아도 자기 배불리고 자기 일가(一家) 편하기만 원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썩은 나라라는 사실이 절망감을 부추기지만 한편으로 나라가 망한 날 죽은 자 있으니 아직 그 나라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선생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순종 4) 경술국치일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역사를 그린 ꡒ매천야록ꡓ(梅泉野錄), 19세기 동학혁명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는ꡒ오하기문ꡓ(梧下記聞), 한시(漢詩)를 중심으로 한 선생의 유고집 ꡒ매천집ꡓ(梅泉集)이 선생이 남긴 대표작들. 이 글들 안에는 나라사랑, 나라 걱정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늘 ꡐ나라ꡑ를 앞세운 그였기에 나라에 누(累)를 끼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그의 붓 아래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인 고종과 그의 비(妃)인 민씨, 또 세도가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의 친인척, 나라의 녹을 먹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고관대작들, 나라가 어지럽다며 남을 해하는 도적떼의 우두머리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ꡒ매천필하무완인ꡓ(梅泉筆下無完人), 즉 세상은ꡒ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ꡓ고까지 말하고 있다.

 
  모든 역사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당시 시대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천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지 모른다. 그만큼 선생은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1855년생이니 선생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3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쇄국의 빗장을 연 지 2년 후 태어났다.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큰 것만 꼽아 봐도 시대가 어느 정도 격변기였는지를 알게 된다.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ꡐ병인사옥ꡑ, 미국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격침당한 ꡐ셔먼호 사건ꡑ, 프랑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습격했던 병인양요. 하나하나가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 사회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충격을 안겨줬을 만한 이 세 가지 사건들이 모두 그의 나이 11세 때 일어났다. 처음 한시를 지어 향리 어른들을 놀라게 한 바로 그때였다.
 

ꡐ신동ꡑ소리를 듣던 명민한 그가 세상사 돌아가는 일,ꡐ역사ꡑ에 무심할 리 없었다. 19세기 중반 문호 개방을 요구하던 외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조선은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3년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 중반 조선의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급선회했다. 개국이 세계적 추세라는 인식이 지배층에 유포됐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며 철저한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하야한 것이 정책 변화의 주요 동기였다. 조선이 마침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은 선생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다. 피 끓던 젊은이였다.

 
  그는 외세의 압력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쇄국의 빗장을 연 것을 한탄했다. 극심한 사회 혼란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개국파와 쇄국파의 분란에 굶주린 민중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여기에 자기 몫만 챙기는 부패한 세도 권세가들이 있지 않은가.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며 시름에 잠긴 그가 방 한쪽 구석에서 시로 마음을 달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단심(丹心)에 이해가 간다.

 
  매천선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그가 정통 유생(儒生)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장수(長水) 황씨로 세종대의 명재상이요,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 황희4)의 후손임을 늘 자랑삼아 얘기했던 그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활약한 황진(黃進5)), 인조 때 정언(正言)을 지낸 황위(黃暐)6)는 가문을 빛낸 또 다른 자랑거리.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얘기가 달랐다. 8대조인 황위이래 벼슬이 끊ꡐ몰락양반ꡑ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잔반(殘班)들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신세는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전남 광양(光陽)에서 손꼽힐 만큼 거부였다. 모두 조부와 부친 황시묵(黃時黙)의 덕이었다. 조부는 조상이 물려준 가난을 딛고 부(富)를 모았으며 부친은 이를 잘 관리하여 영특한 아들이 아무 걱정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서적 1천권을 사줬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집안의 뒷받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매천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집안에서는 그의 영특함이 8대조 이래 벼슬한 사람이 없다는 가문의ꡐ치욕ꡑ을 씻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매천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마을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천자문을 간신히 떼어도 다행일 11세의 나이에 멋들어진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朱子)의 ꡒ통감강목ꡓ(通鑑綱目)은 모두 암기했을 정도였다. 그가 벼슬에 대한 집안의 뜻을 처음부터 거슬렀던 것은 아니다. 14~15세 때 본도시(本道試)에 응시했고 17세 때는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도 응시하면서 자신의 필력(筆力)을 떨쳤다. 글에 대한 욕심도 한껏 커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시골 한 귀퉁이에서 그를 만족시키는 문장가와 새 학문을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은 19세 되던 해 그가 무작정 상경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ꡒ유림노사(儒林老師)의 진부한 학문(儒者陳腐之學)에 염증을 느낀다ꡓ며 그해 홀홀단신으로 서울을 찾았다.

 
  이후 그의 행각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로써 세상을 논하고자 서울의 내로라하는 논객들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시골뜨기 선비가 서울의 최고 문인들에게 도전장을 낸 셈 이었다. 처음에는 우습기도 했겠지만 그의 글은 이내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때 만나 평생 뜻을 같이했던 동료들은 조선의 쟁쟁한 문인들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7), 추금(秋琴) 강위(姜瑋)8),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9),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0) 등이다. 특히 이건창과의 교우는 신교(神交)로 알려질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영재는 매천의 글을 가리켜 ꡒ붓끝의 기백은 반고(班固․後漢의 역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ꡓ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은 조선시대 선비의 최고 꿈인 관계 진출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ꡒ마을마다 급제자가 나오고 집집마다 진사가 있을 정도ꡓ로 혼탁한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도 집안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해 과거를 친 적이 꼭 두 번 있다.

 
  처음은 1883년(고종 20), 그의 나이 29세 때 일이었다. 정기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 초시(初試)에 응시해 차석을 차지한 것이 첫 시험 성적표다. 고향에서나 집에서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ꡒ시골 사람에게 수석 자리를 줄 수는 없었다ꡓ는 말에 분개해 낙향하고 말았다.

 
  썩어빠진 관료들의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ꡒ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ꡓ고까지 했다. 더러운 세상에서 입신출세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번 과거를 보게 된다. 8대 동안 급제자를 내지 못한 집안의 치욕을 씻어 보겠다는 부친의 뜻은 좀처럼 꺾일 기세가 아니었다.

 
  매천의 부친은 그가 고향에 돌아온 후 늘 ꡒ내 생전에 너는 반드시 과거에 응시해야한다ꡓ며 관계 진출을 부추겼다고 한다. 부친의 뜻을 이기지 못해 두 번째 시험장에 나선 것이 1888년. 3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성균관 회시(會試) 생원시(生員試)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당당하게 장원(壯元)으로 합격, 금의환향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시험감독 정범조(鄭範朝)11)가 재주를 인정했다 하여 기분도 좋았겠지만 부친의 뜻이 하도 강고해 그는 일단 성균관 생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로소 중앙 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무능력한 국왕, 추악한 세도가, 부패한 관료들 틈새에서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가 할 일은 오직 책읽기와 책 쓰기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왜 관료로서의 출세를 마다하고, 또 좋은 벗들이 그토록 만류했는데도 서울을 떠났을까. ꡒ매천집ꡓ을 엮은 창강 김택영의 얘기를 들어보자. 1933년 소화 8년에 간행된 "매천집". '삭제'라는 표시가 조선총독부의 검열 표시를 나타낸다.ꡒ당시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우환이 날로 커지고 있었으며 정사(政事) 또한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던 매천은 마침내 두문불출, 서울에 모습을 내놓지 않고 오직 책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서울 친구들이 가끔 편지를 보내 서울을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 아니냐며 책망의 말을 하니 매천은 ꡐ자네들은 어찌 나로 하여금 귀신 나라의 미친 무리들 속에 끼어 미친 귀신 짓을 하게 하고 싶어 하는가ꡑ(子奈何欲使我入於鬼國狂人之中, 而同爲鬼狂耶)라고 했다.ꡓ(매천집 1권) 귀국(鬼國)과 광인(狂人).

 
ꡐ귀신나라와 미치광이들ꡑ이라는 이 말은 20세기를 전후해 외우내환(外憂內患)과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조선에 대한 매천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 구미 열강들은 물론 청과 일본까지 잡아먹겠다며 나선 마당에 무슨 세도가요, 무슨 왕실의 친인척까지 나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는 말인가. 역사가 매천의 눈에 조선은 귀신과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매천은 결국 이 사사로운 세상을 떠나 향리에 칩거하며 평생을 세상에 대한 ꡐ관찰자ꡑ로만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짐없이 수집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후세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만들어 줬다. 고향 광양으로 돌아온 후 거처를 구례로 옮긴 그는 1890년 개인 서재를 마련해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ꡐ구안실ꡑ(苟安室). 서재 이름에조차 그의 생각이 묻어 있다. ꡐ구차하게 쉬는 방ꡑ이며 동시에 ꡐ구차하지만 편안한 방ꡑ이다. 또 ꡐ구차하게 편안함을 구하는 방ꡑ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방에서 그는 자신을 역사가로 인정받게 한 ꡒ매천야록ꡓ과 ꡒ오하기문ꡓ을 썼다.

 
  매천의 역사관을 보자.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ꡐ망국ꡑ(亡國)이다. 누구 때문에, 왜 나라가 망했는지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한자의 어법을 십분 활용한 풍자와 비판은 그를 더욱 확고부동한 ꡐ역사가ꡑ로 만든다. 누가 나라를 망하게 했는가. 그가 우선 꼽는 사람은 왕과 명성황후 민씨였다.

 
  매천은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망국의 첫 번째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의 글을 본 현대 역사가들은ꡐ매천이 왕과 비를 저주했다ꡑ거나ꡐ일본보다 더 미워했다ꡑ는 등의 해석을 주저없이 쓸 정도. 매천의 붓 끝은 무엇보다 이들의ꡐ인재등용ꡑ을 질타하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매천이 조선을 ꡐ귀신나라ꡑ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다.

 
  ꡒ매천야록ꡓ은 무당 진령군(眞靈君)의 중용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ꡐ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충주에 피난가 있던 민비의 환궁일을 예언하여 중용되자 수령이나 병졸, 수사(水使)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재상(宰相)들이 다투어 자매와 의자(義子․의붓아들)가 됐다.

 

  그리고 한말에 법무대신까지 지낸 김해 출신의 이유인(李裕寅)은 궁핍한 무뢰배임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부릴 수 있다 하여 진령군의 추천을 받아 양주목사로 부임받기도 했다.ꡑ그가 열거하고 있는 무당과 점술가의 중용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ꡐ점술가 안영중(安永重)은 현풍군수로, 거창 출신 차성충(車聖忠)은 요술을 부릴 줄 안다 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
 

ꡐ왕은 진령군이 죽자 상복을 입었던 그의 의붓아들 김사묵(金思黙)이 경무사(警務使)로 있을 때 탄핵을 받았으나 진령군을 생각해 그대로 유임시켰으며…ꡑꡐ충주인 성강호(成康鎬)는 귀신을 알아볼 수 있다 하여 왕이 죽은 민비를 보게 하고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성시(盛市)를 이뤘다ꡑ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고종을 가리켜 ꡐ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만 그 일이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착찹하게 된 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고는 했다ꡑ고 쓰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 민란이 계속되는 이유였다. 민란이 끝난 후에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흥민란, 북청민란, 제주민란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더 커지자 민란을 잠재울 인재를 구했다고 했다.

 
  일단 고종이 최종적으로 등용했던 서정순(徐正淳)․이규원(李圭遠) 등은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ꡐ민란이 평정되면 그대로 방치했다ꡑ고 쓰고 있다. 발본색원하지 않고 임시방편의 처리만 함으로써 사회 혼란이 가속화됐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고종의 야합과 편협, 우유부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우선 그는ꡒ고종의 성품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남들과 영합하기를 좋하했다ꡓ고 말한다. 이건창이 충청감사 조병갑의 탐학(貪虐)을 조사해야 한다는 건의를 묵살한 후 그를 기피했으며 자신을 노론(老論)이라 하며 남인․북인․소론 등 3색을 노골적으로 천대함으로써 최고 통치자로서의 불편부당성을 망각하고 나아가 관료의 당파싸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각 대신들을 임명하고 1주일도 채 안돼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ꡒ부하직원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ꡓ는 탄식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고종이 뇌물을 좋아했다는 말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ꡒ남정철(南廷哲)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도 안되어 평안감사가 됐다. 왕가의 친척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출세한 것은 근세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감영(監營)에 있을 때 고종에게 계속 뇌물을 바쳤는데 고종은 그가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영선사(領選使)로 임명해 톈진(天津)으로 보내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이 남정철과 교체된 후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조각을 황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얼굴빛이 바뀌며 남정철을 꾸짖었다. ꡐ남정철은 알고 보니 큰 도적놈이로구나, 관서(關西)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혼자 독식했다는 말이냐?ꡑ 이때부터 그에 대한 총애는 쇠퇴했고 대신 민영준이 날로 중용됐다.ꡓ(매천야록)

 
  명성황후에 대한 글 역시 여러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악독한 성품인지…. 매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말 ꡐ귀신 나라ꡑ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매천야록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ꡒ신묘년(1891년) 겨울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강(堈)을 의화군(義和君)에 봉하자고 권했다. 의화군은 상궁 장씨(張氏)의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 … 큰 소리로 ꡐ칼 받아라ꡑ고 외치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명성황후는 …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ꡐ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ꡑ고 한 후 장정을 불러 그녀를 포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후 장씨는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해 죽고 말았다.ꡓ(매천야록) 명성황후와 함께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도 매천은 극히 싫어했다. 요직을 모두 차지한 후 온갖 부정부패를 다 저지르고 있었으니ꡐ망국ꡑ의 또 다른 기여자였다.ꡒ오하기문ꡓ에서 그는ꡐ대개 성이 민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다.

 
  전국의 큰 고을이라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 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됐다ꡑ고 쓰고 있다. 나라를 잡아먹는 귀신은 다름 아닌 민씨 일가임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민씨 가문에 대한 혐오증이 드러난다.

 
4. 개화당, 동학혁명에도 부정적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개화파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매천의 평가는 결코 좋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매천이 외면당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메이지유신에 비교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갑신정변에 대해 매천은 거의ꡐ최악ꡑ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 중심 세력인 개화당을 가리켜ꡐ도적ꡑ이나 ꡐ역당ꡑ(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살육과 횡포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ꡐ음모ꡑ의 실패를ꡐ하늘의 뜻ꡑ으로 말하고 있다. 동학혁명에 대한 것은 개화당 이상이다. 매천에게 동학은 ꡐ굶주린 백성을 선동하는 술수ꡑ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동학도를 가리켜 서슴없이ꡐ동비ꡑ(東匪)ꡐ비도ꡑ(匪徒)ꡐ비적ꡑ(匪賊)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 도적떼 라는, 적의에 찬 용어들이다. 심지어 ꡐ그들에게 교형(交刑)을 처하고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은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ꡑ고 쓰기까지 했다.

 
  그는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다 전사한 김한섭(金漢燮)을 추모하는 시구에서 동학도를 가리켜 개미․뱀․돼지로 비유하고 있다. ꡐ지난해 호남의 적들 개미떼 같더니(往歲湖南敵如蟻)/눈 깜짝할 새 뱀․돼지떼가 됐구나(轉眼猖獗蛇而豚)ꡑ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천의 눈에는 도적이요, 모두가 미치광이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몇몇 인물들에 대해 그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충신이요, 이들의 정신이야말로 유일한 나라의 희망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침략의 손길을 뻗치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들. 이들에 대한 매천의 마음은 각별하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순국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리 후대인들은 그의 사실적 묘사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선열들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ꡒ1905년 11월4일, 민영환12)(閔泳煥)이 자결했다 … 민영환은 탄식하기를 ꡐ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ꡑ하면서 옛 하인인 이완식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묶었다….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 이완식을 부르며 ꡐ내가 설사를 하였으니 끓인 물을 조금 갖다 주게, 내 손을 조금 씻어야겠네ꡑ라고 하자… 그는 손을 씻은 후 통증을 느끼는 듯한 말로 ꡐ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고 이럴까ꡑ라고 했다. 이완식은 크게 놀라며 화급히 그를 끌어안고 문을 부수듯 방으로 들어갔다. 선혈은 이미 그의 다리까지 묻어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절명한 상태였다. 벽에는 피묻은 흔적이 있었다. 촛불을 밝혀 보니 손가락으로 문지른 자국이 완연했다. 차고 있던 칼이 짧아 첫 번째 찌를 때 죽지 않고 피가 칼자루에 묻어 칼자루가 미끄럽자 손을 벽에다 닦은 후 다시 정신을 차려 찌른 것이다. 그는 후관(喉管․목구멍)이 다 베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완식은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온 가족들도 그를 따라 울었다. 그 곡성(哭聲)은 서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성안으로 퍼져 산이 꺼질 듯이 요란했다.ꡓ(매천야록)


  매천의 순국자에 대한 애정은 정말 남달랐다. 그의 붓은 단지 민영환과 같은 고관대작에서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잃어 비분강개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에게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아주 상세한 묘사를 통해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을 역사가의 의무로 알았음직하다.
 
  그가 많은 양을 할애한 순국지사 김봉학(金奉學)은 평양에서 징집된 일개 병졸에 불과했다.ꡒ어찌 왜놈을 때려죽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는 그의 말에 여러 장병들이 웃고 말자 그는 영문(營門)으로 달려가 입에 칼을 물고 한번 높이 뛰어 내려 엎어졌고 그 칼은 등을 관통했다ꡓ고 썼다.
 
  순국의 전말을 잘 모른다면서도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의 죽음에 대해 아는 한도 내에서 기록을 남겼다. 힘이 닿는 한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민영환의 사랑채에 살며 인력거를 끌던 인부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목을 맸다는 사실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5.ꡒ가련타 ,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ꡓ

 
  그러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3)만큼 그의 마음을 비탄에 빠지게 만든 순국지사는 없었다. 면암은 잘 알려진대로 개항기 흥선대원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유림(儒林).

 
  1868년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한 후 삭탈관직 당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기용된 후에도 끊임없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해 제주도 귀양살이까지 한, 한말 쇄국을 주장했던 대표적 선비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으로 유배되어 단식 끝에 죽었다. 


  매천은 면암이 두번째 상소를 올려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ꡒ한성의 사녀(士女)들은 술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향화(香火)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여 그 불빛이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이토록 최충신(崔忠臣)이 다시 살아난 것을 경축한 것이다ꡓ라며 그의 고결한 정신을 찬양했다.
 
ꡒ매천야록ꡓ은 면암이 죽고 그 시신이 부산 동래를 찾던 날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ꡒ11월17일 전 판서(前判書) 최익현이 쓰시마에서 사망했다. … 그리고 21일, 그 상여가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나라 상민들은 상점을 열지 않고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 그 상여를 따르며 미친 듯이 통곡하는 사람은 셀 수 없었다.

 
  스님․기생․걸인들까지 영전에 바칠 제물 광주리를 들고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 그리고 그 부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모여 동래를 출발하던 날에는 상여가 거의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무슨 변이 생길까 싶어 매우 엄하게 호위하면서 … 이때 사대부로부터 가동주졸(街童走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를 ꡐ최면암이 죽었다ꡑ고 하면서 슬피 울었다.

 
  나라가 세워진 이후 죽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ꡓ(매천야록) 이ꡐ조문객 안에는 매천도 있었다. 한을 품고 굶어 죽은 면암을 위해 사대부들은 만사(輓詞) 하나씩을 써 그의 저승길을 달랬다. 그의 빈소에는 만사 수천장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매천이 써놓은 만사 6수도 있었다.

 
6. 국내 漢詩史에서도ꡐ으뜸ꡑ
 
ꡐ곡면암선생ꡑ은 면암 선생을 기리는 만사로 뿐만 아니라 국내 만사 중에서도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한시학자 이병주(李丙疇)는 매천의 시가를 가리켜 ꡒ지극히 깔깔하고 꼼꼼해 우리 한시사에서도 손꼽힌다ꡓ고 평했다.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또한 ꡒ한국통사ꡓ에서 매천을 두고ꡐ기절(氣節)이 사림(士林) 중 으뜸ꡑ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의 삶은 물론이요, 그의 한시에도 지조와 절개가 알알이 배어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나라의 존망을 우려한 시, 나라의 영원을 기원한 시, 지배계급을 조롱한 시가 많지만 어디서고 그의 지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매천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름은 알려졌지만 그저ꡐ한시에 능한 순국지사ꡑ정도였다. 50년대 그의ꡒ매천야록ꡓ이 출간되고서야 비로소 그와 그의 역사관이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ꡒ매천야록ꡓ을 중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여서 이다.

 
  그의 기록에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도 담겨 있다. 거기에 기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도 별반 없었다. 자칫 떠도는 소문만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의 역사관은 지극히 ꡐ부정적ꡑ이었다. 왕실이나 세도정치가들, 매국노가 난자당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개화파에 동학군까지 ꡐ도적놈들ꡑ이라 부르는 그의 역사관을 수용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7. 매천(梅泉)의 비판의식, 지금도 귀감ꡑ

 

  또한 그가 갖고 있던 현실인식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우선 청에 대해 의존적이었던 전통적인ꡐ화이론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을 통해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으며 청의 내정간섭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찾아보기 어렵다.
 
  갑신정변에 대한 청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대목도 있다. 특히 서양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규, 구미 열강과의 통상조규 등에 대한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그와 관련된 국제정세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양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경계심만 나타낼 뿐이라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개화당이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국제관계를 비롯한 전체적인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편견에 따르는 개인적 의견을 기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점이나 한계를 지적받는다 해도 결코 폄하될 수 없는 매천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ꡐ비판의식ꡑ이다. 그것도 지식인이 갖고 있는 비판의식이다. 매천은 뚜렷한 주관을 갖고 사물을 봤으며 그의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명백히 했다.

 
  부정부패는 그가 일본보다 혐오했던 ꡐ괴물ꡑ이다. 넘쳐나는 장원급제자, 돈에 팔고 팔리는 힘센 ꡐ자리들ꡑ,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 심지어 그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왕과 비의 부정부패까지 증오했다. 민생의 피폐는 물론 망국까지 모두 이들의 책임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중사관의 시각일 수도 있다.

 
  폭력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 갑신정변이나 동학혁명에 대한 해석은 그 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아가 그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유림까지 그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해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ꡐ서원을 창설했을 때는 매우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날로 폐단이 심해졌다ꡑ는 기록도 남겼고 피폐해진 사대부들을 가리켜 ꡒ이 어찌 사론(士論)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ꡓ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주자학 자체를 비판한 대목도 있다.
 
ꡒ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송(宋)과 같이 진짜 유림을 배출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나친 흠모가 고질병이 됐고 … 근세에 선비라는 자가 … 장황하게 공허한 문자를 늘어놓는다ꡓ며 질타했다. 그는 대신 실학을 높이 평했다.

 
  정약용(丁若鏞)에 대한 글은 거의 흠모하는 수준에 이른다. ꡒ다산(茶山)의 심기는 고상하여 오직 좋은 점만 있으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여겼다ꡓ거나 ꡒ실용적인 학문에만 힘을 기울여 구태여 옛 학문을 따르지 않았지만 … 결코 그들의 문장력과 바꿀 만한 것은 아니다ꡓ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매천을ꡐ민족주의적 실학자ꡑ로 보는 것은 여기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정신에 비춰보면 그의 시각이나 입장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주관을 갖고, 어떤 부정부패나 야합에도 반대하고, 어떤 세도가나 권력에도 물러서지 않는 그만의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목숨까지 바쳤다. 그것을 바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무로 봤다. 예나 지금이나 ꡐ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ꡑ란 쉽지 않은 것이다. 매천의 말 그대로이다.

 
8. 매천이 남긴 저작물들

 
 ꡒ매천야록ꡓ은 1950년대,ꡒ매천집ꡓ은 1980년대 전모 드러났다. 매천이 남긴 저작은 ꡒ매천야록ꡓ ꡒ오하기문ꡓ ꡒ매천집ꡑ 등 3종. 동학혁명만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 ꡒ동비기략ꡓ(東匪紀略)은 원전이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저작은 종류로 보나 양으로 보나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학 또는 한시학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저작들로 취급받는다. 구한말의 시대상이나 한시의 발전을 말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서적이 됐다. 또한 매천의 책은 한말 비사(秘史)에 반일(反日)정신이 농축되어 있어 출간과 번역에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ꡒ매천야록ꡓ. 이 책은 누가 봐도 비사(秘史)나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 관보를 비롯해 각종 신문을 참고한 것은 물론 본인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 풍문으로 떠돌던 것, 요직에 있던 인물로부터 들은 것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첫 아들 세자가 고자(鼓子)였다거나, 명성황후가 직접 나서 궁비(宮婢)에게 잠자리를 갖게 했으나 실패했다거나, 궁녀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자 민비가 칼을 들고 쫓아갔다는 등의 얘기는 ꡒ매천야록ꡓ이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따라서 매천은 자손들에게 ꡒ이 책을 절대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말라ꡓ는 유언을 남겼고 자손들은 상당 기간 이 책을 비밀에 부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후손들이 원본의 훼손이나 분실을 우려해 다수의 복본(複本)을 만들고 이를 생전에 매천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김택영에게 교정을 부탁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이 책을 운반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 ꡐ한국사료총서ꡑ 제1집으로 간행해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접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1994년 교문사에서 한학자 김준의 번역으로 완역본이 발간됐다.

 
 ꡒ오하기문ꡓ 역시 94년 역사비평사에 의해 처음 완역(김종익 옮김)됐다. ꡒ매천집ꡓ의 발간도 적지않은 고충이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천이 순절할 당시 매천은 동생 황원에게 ꡒ김택영은 시문의 정리를 맡아준다 해도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ꡓ라면서 김택영이 정돈해 주기를 원했고ꡒ시는 연대에 따라, 문은 주제에 따라 나누어 글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해 정리하라ꡓ고 유언을 남겼다.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서 매천의 글을 정리해 1911년과 1913년 초간본으로 간행했고 박형득(朴炯得)은 이를 기본으로 시문을 선별 편집해 ꡒ매천시집ꡓ을 발간했다. 이들 문집은 매천이 순국한 후 동생과 문인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2백70여명으로부터 출연받아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들 문집에 적지 않은 작품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방(李建芳)과 황원이 ꡒ매천집ꡓ에서 빠진 글을 다시 정리한 시집이 발견된 것이다. 일명 총독부 검열본으로 이름붙여진 이 시집은 총독부의 검열 표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일제 치하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 연구에도 일조하고 있다.
 
  검열본에는 시문의 상당 부문에 ꡐ치안방해ꡑꡐ일부분 삭제ꡑꡐ삭제한 곳을 공란으로 두지 말 것ꡑꡐ삭제한 내용의 요지를 기록하지 말 것ꡑ등의 표시가 곳곳에 묻어 있다. 매천은 죽어서도 일본의 압제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ꡒ매천집ꡓ은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지만 후학들의 연구서를 통해 그의 시향(詩香)을 느낄 수 있다.

 
 이병주의 ꡒ한국 한시의 이해ꡓ(민음사, 1987), 민족문학연구소의 ꡒ한국고전문학 작가론ꡓ(소명, 1998)이 대표작. 간단하게나마 그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글은 정옥자 등이 쓴 ꡒ시대가 선비를 부른다ꡓ(효형, 1998)와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가 쓴 ꡒ실사구시의 눈으로 시대를 밝힌다ꡓ(강, 1999) 등을 보면 좋다.

 
9. 매천선생을 생각하며

 

  대부분의 우리에게서 매천선생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 그러니까 불과 한두 줄로 간단히 요약되는 지식이 고작 아닌가 한다. 선생의 영정 앞에 참배를 한 후에 다들 분위기가 숙연해 지는 한편, 한 가지 의문의 까다로운 수수께끼가 있을 수 있다.
 
ꡒ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왜 지도층에 있는 선비나 관리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ꡓ<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신복룡, 풀빛>에서 외국인들의 조선견문록에서도 똑같은 의문을 소개하고 있다.

 
  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절, 그러니까 임오군란, 명성왕후 시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많은 관리나 선비들이 자결을 했던 것을 두고 외국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글을 남겼던 것이었다.

 
  당시의 허망한 무력감과 비분강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래도 망국지경에 지도층에 있는 선비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궁리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 경우, 그 아래 무지렁이 민초들이 당할 정신적 공황은 누가 보살핀단 말인가? 또한 대한제국을 통째로 삼키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여론주도층인 선비가 제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사라져준다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것이 아닌가?

 
  이 답답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梅泉野錄, 황현, 허경진 옮김>을 구하여 보자. 이 책은 고종 원년(1864)부터 순종 4년(1910)까지 47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매천 선생이 후세에게 전하고 싶어 하셨던 속뜻을 나름대로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서도 시골선비라 하여 2등으로 내리는 당시의 부패한 조정에 실망하여 향리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초야에 묻혀 후세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예리한 사관(史官)의 입장에서 무려 47년간에 걸친 역사를 남기게 된다.

 
  이 책에는 집권층의 부패,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항거, 동학의 봉기와 의병들의 투쟁,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등등.... 특히 지배층의 실정(失政)을 기록할 때는 시중에 떠도는 유언비어까지 채집할 정도이며, 일부 기사는 왕정체제 밖에 몰랐던 한말의 선비로써 인식의 한계를 들어내기도 한다.

 
  일례로 동학도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비적(匪賊)으로, 또 의병을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무능과 부패를 다룬 것과 당시의 하와이나 멕시코로 떠난 한인이민의 상황까지 기술한 것을 보면 초야에 묻혀 사는 일개 선비인 선생의 정보수집에 대한 열의는 물론, 그 방대한 정보량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명성왕후와 고종이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벼슬을 주어 지방의 수령방백의 등용은 물론 나라 정책까지 주무르게 하는 대목에서는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역사책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권력층의 부패, 왕에서부터 일개 아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부패된 상황을 읽다보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러고도 대한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가가 의아해 질 정도였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선현의 말이 떠오른다.ꡒ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 스스로 멸망 할 짓을 한 연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 -孟子ꡓ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키니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진정으로 매천 선생의 죽음은 손가락이고, 나라를 멸망으로 내몰게 한 집권층의 타락과 부패를 기록한 <매천야록>이 달이 아닌가 한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최고 권력층 주변의 부패를 보며 <매천야록>의 교훈을 곰곰이 새겨보게 된다. 기술은 이미 세계와 어깨를 겨누는데, 우리의 정치권은 여전히 백년전의 상황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다시금 매천선생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매천 선생의 죽음의 의미는 지조 있는 선비 개인으로써의 인(仁)을 완성하고 가신 데 그치지 않고, 선생이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참뜻은 부끄러운 선대의 역사를 거짓 없이 아로새겨서 부디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리라.

 
   梅泉선생! 의로운 죽음14) 뒤에 숨겨져 있던 선생의 정신이 매천사우(梅泉祠宇)내의 짙은 매화향기로 승화되어 우리들 가슴속에도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는 느낌이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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