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월, 충숙공 이예와 이휴정이 자리한 땅
[김진영의 울산여지도-41] 은월, 충숙공 이예와 이휴정이 자리한 땅 남산 열두 자락 마지막 봉우리 달빛 감추고 풍경을 품은 절경 김유신부터 이예까지 인물 배출
기자명 김진영 논설실장 입력 2023.12.06 20:49 지면 14면
은월봉 아래 위치한 이휴정  동지로 향하는 하늘은 햇살보다 달빛이 그윽하다. 울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햇살이 비치는 땅이지만 밤은 달빛으로도 넘쳐난다. 그런 연유인지 남쪽 상개에 함월이, 북쪽 성안에 또 다른 함월이 울산의 아래위를 달빛을 품은 봉우리로 앉아있다. 그렇다고 울산이 가득차고 부풀어 오른 달빛만 풍성한 땅은 아니다. 달빛을 품은 함월(含月) 만큼 달빛을 숨긴 은월(隱月)도 여럿이다. 오늘 울산여지도가 찾은 땅이 바로 새벽 무렵, 마지막 남은 달빛까지 숨긴 땅 은월이다. 이 땅은 남산과 은월사, 그리고 김유신 장군을 다루면서 한번 스친 곳이지만 오늘은 이휴정을 품은 신정동을 밟기 위해 다시 찾았다.
다시 찾은 은월은 울산 도심의 안산격인 남산 12봉의 동남쪽 마지막 봉우리다. 남산은 남구 신정동·옥동·삼호동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해발 121ｍ이다. 울산의 도심 쪽과 가장 가까운 은월봉에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서쪽 삼호산(三湖山)과 연이은 열두 폭의 진경이 잔잔하다. 은월봉 아래는 월평으로 이어진 신정동이 자리 잡았고 남서에 옥동, 서쪽에 삼호가 펼쳐진 넉넉한 물산을 흐르게 하는 길지다.
은월의 역사는 오래고 깊다. 조선조 여지도서 울산 편에 "은월은 태화강 남쪽 절벽에 있다. 달 그림자가 봉우리에 숨어 이름이 은월이다."고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 편에도 "은월은 군(郡) 동쪽에 있다."라고 기록해 지명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이 땅에서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기와 조각이 발견된 토성터가 있어 산성뫼라고도 불렀다. 또 다른 이름으로는 은월의 정상부에서 태화강을 내려다보면 벼랑 자락에 비녀 모양의 바위가 있어 비내봉(飛來峯)이라는 이름도 남아 있다.
은월에 얽힌 인물은 앞서 다룬 신라의 영웅 김유신이 으뜸이지만 오늘 찾아가는 이휴정의 주인공인 조선조 외교사의 일등 공신으로 이름난 이예 선생도 있다. 은월 아래 태화강변으로 미끄러진 자리에는 도심 속 서원 용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은월만큼 숨은 곳이라 울산시민들도 이동네 사람이 아니고는 서원의 존재를 잘 모른다. 이 서원과 연결된 인물이 조선 외교의 상징인 충숙공 이예다. 이 용연서원은 이예 선생과 후손인 이동영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조선조 전통서원으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됐다가 다시 중건한 도심서원이다.
이 서원을 잠시 기웃거리다 밖으로 나가는 작은 통로를 따라가면 정자 하나를 만난다. 바로 이휴정이다. 이 정자의 주인공은 조선조 성균관 유생 이동영이다. 그의 호가 이휴정인데 경사와 필법에 능통한 인재였다고 전한다. 몸이 약했던 그는 어린시절부터 문재를 뽐내 성균관에서 수학하다 낙향해 요절했다고 한다. 후학을 가르치던 동영이 조부가 한담을 즐긴 정자 지은정이 불타자 그 자리에 새 정자를 짓고 은월과 태화의 아름다움에 취했다는 이름으로 ‘이미정(二美亭)’이라는 이름을 정자의 편액으로 걸었다.
이미정이란 이름이 이휴로 바뀐 곡절도 남다르다. 조선조 감찰관격인 박제연이 울산을 찾아 이예 선생 집안의 후예가 지은 정자를 찾아 이동영에게 "조부 난은공이 산수간에 머물며 호탕하게 살았는데 이러한 것을 휴산휴수(休山休水)라 한다"라며 정자 벽에 시를 남겼고 이를 본 이동영이 정자 현판을 그 자리에서 ‘이휴정’으로 바꿨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휴정은 월평사람 이동영과 북쪽 송정마을 박창우와의 우정으로도 유명한 정자다. 박창우는 영천 사람으로 28살 때 이동영이 권해 울산으로 이사를 와 박상진 장군으로 유명한 송정마을의 입향조 된 인물이다. 울산에 함께 살게 된 두 사람은 태화강에 배를 띄우고 시문으로 문답하며 풍류를 즐겼다고 전한다.
이휴정이 울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동영의 9대조인 충숙공 이예 선생 때문이다. 이예의 자손들은 대대로 조선조의 충신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학성이씨 이예의 집안을 두고 조정에서는 한집안에 여럿의 충절이 났다는 뜻으로 일문다의사충절(一門多義士忠節)이라 칭송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바로 이예(李藝·1373년~1445년)다. 이예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학성, 아호는 학파(鶴坡),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울산의 뿌리 성씨인 학성 이씨의 시조이자 조선조 초 왜의 류큐 왕국과의 외교를 전담한 대표적인 조선 통신사다. 신라 이전부터 왜구와 왜인의 노략질 대상이 됐던 울산은 조선조에도 왜의 폐해가 극에 달했다.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세를 확장한 왜구는 1397년 3,000명의 도적 떼를 끌고 울주 해안을 급습했다. 이때 울주군수 이은(李殷)과 백성 수백명이 사로잡혀 끌려갔다. 이때 울주 관아에 있던 관리들 대부분은 도망가 숨었지만 향리였던 이예는 자진해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보필했다. 왜에 끌려간 이예는 왜구와 끈질긴 협상을 벌였고 조정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군수 이은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이예의 기개와 충심을 인정해 벼슬을 내려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이런 오래고 깊은 역사가 담긴 자리가 이휴정이다. 울산에는 이처럼 역사성과 상징성을 가진 장소가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조선통신사의 징표다. 성남동 울산도호부 자리 앞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은 바로 충숙공 이예 선생의 흔적을 쫓고 있다. 이 표지석은 울산시민들이 낯설어하지만 조선시대, 왜로 가는 통신사가 지나던 통로였다. 지난 2007년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을 맞아 통신사들이 지나갔던 전국 주요 길목 12곳에 이 표지석이 설치됐다. 통신사들이 한양을 출발해 왜로 가면서 거쳤던 도시에 세웠다. 서울 숭례문 앞에서 대장정에 나선 통신사는 서울 양재, 경기 용인, 충북 충주, 경북 문경·안동·의성·영천·경주를 지나 울산과 양산 웅상, 부산 동래에서 바닷길로 이어졌다. 평화의 시대에 대장정의 길로 이어진 통신사의 길은 조선 조정과 왜의 막부가 선린우호를 다지는 대장정이었고 그 길을 평화의 길로 이끈 인물이 바로 울산 출신 충숙공 이예였다. 그 길이 지금은 7번 국도의 새로운 도로 이예로라는 이름으로 다시 뻗었으니 그 오랜 시간에도 후손들이 충절의 뜻을 잊지 않고 있다는 증좌다. 울산의 자랑이다. 김진영 논설실장
출처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https://www.ius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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